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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源祿

源祿

1904. 4. 4 ~ 194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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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源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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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 의열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장진홍 의거
  • · 대구 격문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4년 (음)4월 4일(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천리(遠川里)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 이가호(李家鎬)와 의병장 허위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 허형(許蘅)의 딸 허길(許吉) 사이에 6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이명으로 이활(李活), 이원삼(李源三), 육사(肉瀉), 이육사(二六四)·(李肉瀉)·(李陸史)·(李戮史) 등을 사용하였다. 형은 독립운동가 이원기(李源祺), 동생으로 서예가 이원일(李源一), 평론가이자 항일투쟁에 참가한 이원조(李源朝)가 이름을 떨쳤다. 1909년 조부 이중직(李中稙)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진성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중등과정의 보문의숙(寶文義塾)에 다녔다. 문중에서 이를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자 여기에 편입하여 1919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가족들이 대구로 이사함에 따라 대구(大邱) 남산동(南山洞)으로 옮겨 살면서 서병오(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921년 경북 영천군(永川郡) 화북면(華北面) 오동리(梧桐里)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과 혼인한 뒤, 처가 근처에 세워진 사립학교 백학학원(옛 백학서원)에서 공부하고 1923년 9개월 동안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가서 도쿄(東京) 간다구(神田區) 긴쇼(錦城)고등예비학교 또는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 들어가 1년간 재학하였다. 1925년 1월 귀국하여 대구에 새로 세워진 조양회관(朝陽會館)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7~8월 베이징(北京) 중국대학 상과(商科)에 입학하여 7개월을 다니다가 1927년 여름에 잠시 귀국하였다. 그 해 10월 18일 대구에서 장진홍(張鎭弘) 의거가 터지자 형제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1928년 장진홍이 붙잡혔음에도 풀려나지 못하다가 1929년 5월에야 증거불충분이란 이름으로 면소되어 감옥에서 풀려났고, 12월 27일 끝내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억울하게 붙잡혀 옥에 갇힌 지가 1년 7개월, 풀려나서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또한 7개월 등 총 2년 2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와 누명 속에 살았다. 1930년 1월 3일 「말」이란 제목의 첫 시를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살아갈 기상과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같은 달 10일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 간부라는 죄목으로 다시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2월에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가 되었으나, 바로 다음 달인 3월 6일 다시 대구경찰서에 잡혔다가 또 풀려났다. 이때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10월에 잡지 『별건곤(別乾坤)』에 ‘이활(대구, 二六四)’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숫자로 적힌 이름으로 유일하게 전해지는 자료다. 이 글에서 대구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의 활동이 미흡하다면서 더욱 강하게 떨쳐 일어서라고 외쳤다. 1931년 1월 21일 대구지역에 레닌의 탄생일을 맞아 격문이 뿌려지는 ‘대구 격문 사건’이 일어나자, 그 주역으로 지목되어 다시 붙잡혀 들어갔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서 3월 23일에서야 풀려났다. 이때가 마침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1주년을 지나는 시점이라 대구에 격문이 나돌았고, 그 주역으로 지목된 것이다.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1932년 1월 14~26일 사이에 『조선일보』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라는 특집 기사를 쓰면서 육사(肉瀉)라는 이름을 썼다. 고기를 먹고 설사하는 뜻을 담았으니, 일제강점기 사회를 지극히 비꼬는 내용이었다. 1932년 3월 조선일보사를 퇴사하고 중국 펑텐(奉天, 현 선양(瀋陽))으로 갔다. 이 무렵 ‘육사(陸史)’라는 이름을 썼다. 선양에서 의열단(義烈團) 출신이자 중외일보 기자였던 윤세주(尹世冑)를 만났고, 그해 9월 일찍이 의열투쟁을 펼쳤던 안동 출신 김시현(金始顯)과 윤세주와 동행하여 난징(南京)으로 갔다. 의열단에서 문을 열게 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려는 길이었다. 같은 해 10월 20일 난징 동쪽 근교 탕산(湯山) 기슭 사찰 건물을 고쳐 만들어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하였다. 권총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33년 4월 20일 1기생 2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졸업하였다. 졸업식에서 「지하실」, 「수레」라는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계급투쟁으로 민족해방을 이루어내는 내용을 담았다. 군사간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국내에서 써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글 「변증법과 자연과학」이란 글이 『대중』 창간호에 실렸다. 그런데 게재되지 못하고 잡지 목록에만 소개되어 있는 글 중 이육사(李戮史)라는 이름으로 적힌 「레닌주의철학의 임무」라는 글이 있다. 육사(戮史)라는 이름은 역사를 죽인다는 혁명의식을 가득 담았다. 따라서 글 제목이나 필명은 이 무렵 사회주의로 무장하여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던 시대인식과 투쟁 방향성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1933년 6월 중순 국내로 잠입하는 길에 상하이(上海)에서 루쉰(魯迅)을 우연히 만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윤세주로부터 자금을 받아 안둥(安東, 현 丹東)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취직을 준비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거점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였다. 1934년 3월 군사간부학교 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安炳喆)이 선양에서 자수하는 바람에 군사간부학교 정보가 드러나서 1·2기생 여러 명과 더불어 붙잡혀 들어갔다. 그 해 6월 풀려났고 8월에 기소유예가 확정되었다. 1935년 중국의 정황을 담은 시사평론을 거듭 발표하였다. 1936년에도 시사평론을 발표하면서도 폐결핵을 앓아 포항(浦項) 송도원과 경주(慶州) 남산 옥룡암에서 정양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는 서울에 머물며 시를 잇달아 발표하였다. 1938년 1월에는 최린의 집에 폭발물이 던져지고 협박문이 우송되자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계속 시와 평론을 발표하였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작품 발표는 왕성하였다. 1941년 폐질환이 심해져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거듭 경주 남산 신인사지 옥룡암에서 요양 생활을 지냈다. 1943년 1월 설날에 신석초(申石艸)를 만나 베이징으로 갈 계획을 밝혔다. 동지 이선장(李善長)에게 충칭(重慶)과 옌안(延安)을 다녀올 이야기며 무기를 들여올 계획임을 말하고 길을 떠났다. 베이징으로 갔다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小祥, 1주기 제사)에 참여하러 귀국하였다. 그러다가 1943년 가을 서울에서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베이징 일본영사관 감옥에 구금되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베이징시 내구(內區, 현 東城區) 동창후뚱(東昌胡同) 1호에 있던 일본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동지이자 진성이씨 같은 문중 출신인 이병희(李丙禧)가 1주일 먼저 풀려났다가 연락을 받고 가서 유해를 인수하여 장례를 치르고 국내로 옮겼다. 동생 이원창(李源昌)이 이를 받아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 고향 원촌마을 뒷산으로 옮겨 묻었다. 광복을 맞은 뒤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광야」, 「꽃」이 발표되었다. 동생 이원조는 1946년 10월 20일 「나의 뮤즈」, 「해후」 등을 『육사시집』에 실었다. 1949년 4월 4일 「산」, 「화제」, 「잃어진 고향」이 『주간 서울』 「작고시인들의 미발표 유고집」이란 코너에 소개되었다. 1956년에는 박쥐를 시제로 삼은 「편복(蝙蝠)」과 한시 3편이 『육사시집』에 발표되었다. 1974년에 가서도 신석초가 갖고 있던 유고 「바다의 마음」이 『나라사랑』에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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