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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해

李雄海

1878. 12. 8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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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이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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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함흥(咸興)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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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기원독립단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10) 1878년 12월 8일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상기천면(上岐川面) 오노동(五老洞)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송해(松海)이고, 이명은 이종익(李宗翼)·이익영(李翼霙)·이송주(李松洲)이다. 국내활동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성립 초기 간부로 선임된 것으로 보아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만주로 망명한 인사들이 1919년 4월 15일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성립시킨 독립군단이었다. 대한독립단의 도총재(都總裁)는 관동의병을 이끌었던 박장호(朴長浩)였고, 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사한장 김기한(金起漢),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등이었다. 대한독립단의 사법부장에 선임되어 이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 독립군단은 만주와 국내에 1백여 개에 달하는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해 조직망을 갖추었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성립된 지 얼마 후 구성원 간에 이념적 갈등이 생겨 두 개의 군단으로 나뉘었다. 조국 광복 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공화제를 주장하는 공화파로 갈라진 것이다. 복벽파는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을, 공화파는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을 만들었다. 이때 기원독립단의 부단장에 선임되었다. 기원독립단의 도총재는 박장호였고, 단장은 조맹선(趙孟善)이었다. 그런데 1920년 초 서간도 관뎬현(寬甸縣)에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가 성립되자, 단장 조맹선이 광복군의 사령장으로 갔다. 조맹선이 떠난 뒤 단장이 되어 기원독립단을 이끌었다. 기원독립단의 간부와 단원 일부는 의병활동 시기부터 무장활동의 경험이 있어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척결, 국내진입전 등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20년대 초 일제로부터 김좌진(金佐鎭), 윤덕보(尹德甫)와 함께 대표적 항일무장투쟁 인물로 지목되었다. 1920년 3월 한병우(韓丙宇)·허창(許昌) 등 4명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배신해 일제 밀정이 된 유기명(柳冀明)을 퉁화현(通化縣) 대도령(大都岺)에서 처단하였다. 그 해 (음)12월에는 관뎬현 모전자(毛甸子)에 기원독립단의 본부를 정하고 50명으로 유격대를 구성해 국내에 진입시켰다. 1921년 3월에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서 만주와 국내에 광고를 해 독립군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음)4월에는 더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재만 독립군계 지도자들과 회합을 가졌다. 그 결과 각 독립군단을 연합해 구역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활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남쪽 방향을 맡기로 하였다. 1921년 11월 12일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9개의 강대국 대표들이 모여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현안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가 개최되었다. 한국 독립운동계는 이 회의에서 한국의 해방이 거론되고 해결될 것으로 큰 기대를 걸고 대표단을 파견하고, 내부적인 준비를 갖추었다. 기원독립단 또한 태평양회의에서 독립이 될 것을 믿으나 만일 되지 못한다면 한민족의 총력을 쏟아 국내로 진입해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결의를 하고 준비하였다. 같은 해 11월경 맹철호(孟喆鎬)를 지휘관으로 한 독립군 30명을 지안현(輯安縣) 남구(南區)에 주둔시키고, 조용준(趙龍俊)을 독립군 80명과 함께 환런현(桓仁縣) 이차구(裡岔溝)에, 박창열(朴昌烈)을 부하 대원들과 함께 번시현(本溪縣)에, 조대능(趙大能)을 부하 대원들과 함께 관뎬현 소아하(小雅河)에 주둔 시키고, 자신은 부하 45명과 함께 환런현 대아하(大雅河)에 주둔하며 국내진입전을 위해 대기하였다. 이같이 내부적 준비를 갖추고 1922년 1월에는 정병진(鄭秉鎭)·김형모(金亨模)·정경순(鄭敬詢) 등 5명의 부하들로 암살대를 구성해 국내로 파견하였다. 이들 암살대는 태평양회의 기간 중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선전문을 배포하고 일제 고관 처단 및 침략기관 파괴 임무를 가졌다. 1922년 초 부하인 사법부장 황병문(黃炳文)과 김효선(金孝善) 두 명을 지린(吉林)으로 보내 권총을 구입해오도록 하였다. 그 해 2월 충청남도로 모연대(募捐隊) 10명을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5월에는 허창(許昌)·곽창주(郭昌柱) 등 20여 명의 독립군들로 모연대를 조직하도록 해 퉁화현 고려묘자(高麗墓子)와 지안현 소위사하(小葦沙河) 등을 왕래하며 군자금을 모집해 왔다.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되는 국민대표회의를 후원하기 위해 1922년 7월 20일부터 회합을 가지고 그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을 중심으로 남양대동통일회(南洋大同統一會)를 결성해 회장에 선임되어 국민대표회의를 후원하였다. 1922년 초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의 독립군단 대표들이 모여 이전과는 다른 적극성을 보이며 실질적인 통합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기원독립단 등이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이어 같은 해 8월 23일에는 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의 대표들을 설득해 환런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이영식(李永植)·최석순(崔碩淳)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 대표로 참가하였고, 그 결과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다. 통의부 성립 초기에 민사부장을 맡아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등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다. 직책이 이주한인을 지원해야할 민사부장이었지만 통의부에서의 활동도 군사적인 것이 많았다. 1923년 3월 2일에는 독립군 57명을 직접 이끌고 환런·지안현 등을 돌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 해 7월에는 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 2소대장 이규성(李奎星)이 무장활동 중 파견대를 요청하자 독립군 10명을 즉시 파견해 주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서울에서 열리는 부업품공진회(副業品共進會)에 참가한 일제 고관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6명의 암살대를 구성해 파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벌인 까닭에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재무부장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통의부내의 무력파로 분류되었다. 통합 독립군단으로 출발한 통의부는 성립될 당시 구성원 간의 이념을 초월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1922년 말 복벽주의자인 전덕원계의 인사들이 공화주의자들인 양기탁(梁起鐸)·현정경 등을 구타하고, 선전국장인 김창의(金昌義)를 사살하였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간부들이 대부분 공화주의계였기에 복벽주의계의 의사가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결국 복벽주의계와 공화주의계의 전면적 무력대결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복벽주의계 인사들이 의군부(義軍府)라는 독립군단을 만들어 통의부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이때 통의부 재무부장을 역임하며 복벽주의계인 의군부세력과 대척점에 섰다. 의군부세력이 나가고 약 1년 후 통의부는 또 다른 갈등이 생겼다.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김원상(金元常) 등이 임시정부를 찾아가 국무위원들과 협의하고 임시정부 직속의 독립군단을 성립시키기로 하였다. 이들은 만주로 돌아 와 통의부의 1·2·3·5중대와 유격대 등을 이탈시켜 1924년 초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켰다. 이 같은 상황이 일어나자 중앙행정위원을 비롯한 통의부 인사들은 이탈한 참의부와 임시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통의부 행정위원회는 1924년 3월 10일 관할 한인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울러 참의부로 이탈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한인사회 지방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민사부장 명의로 새로운 간부를 임명하였다. 일부 인사들이 이탈해 참의부를 성립시키며 내부 분란이 있는 동안 통의부에 남은 인사들은 이장녕(李章寧)·지청천(池靑天) 등과 협의해 만주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또 다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議)가 조직되었고, 이 회의는 계속 통합운동을 추진해 같은 해 7월 10일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그해 11월 24일 자치와 무장항일을 겸한 군정부(軍政府)인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이때 이 통합운동에 찬동하지 않고, 1924년 5월경 통의부를 떠날 것을 밝혔다. 통의부 행정위원회는 같은 해 6월 21일 비상회의를 열어 행정위원직을 해직하였다. 정의부가 성립될 즈음인 1924년 말에는 참의부의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북만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일제 경찰대에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를 거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마치고 1928년 12월 5일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1948년 8월에 개최된 삼일혁명동지회 발기회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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