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赤曉
赤曉1902. 6. 1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염군사
- · 경성출판노동조합
- · 한양청년연맹
- · 신흥청년동맹
-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 · 경성청년회
- ·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 ·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 · 카프쇄신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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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902년 6월 1일 서울 종로구(鍾路區) 청운동(淸雲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금동(李金童·李今童)이고, 이응종(李應鍾)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염군사(焰群社) 동인들끼리 효(曉)자 돌림을 지어 사용하면서 이적효(李赤曉)로 알려지게 되었다. 가정 빈곤으로 인하여 사립보통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15세 때에 이왕직미술공장(李王職美術工場)의 견습 노동자가 되었다. 이후 인쇄회사와 일본·한국 각지 신문사의 인쇄 노동자로 근무하며 온 가족을 부양하였다. 생업에 종사하는 한편,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1922년 9월 서울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문화운동 단체 염군사(焰群社)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까지 문화운동·노동운동·청년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6월 19일 경성인쇄직공조합(京城印刷職工組合) 창립위원회에서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7월 13일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관하였다. 또한 같은 달 27일 열린 제1회 인쇄직공위원회에서 서무부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인쇄주식회사(朝鮮印刷株式會社) 문선공(文選工)들이 일본인 감독의 모욕과 탄압에 항거하며 일으킨 파업투쟁에서 노동자들을 대표해 회사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925년 봄 경성출판노동조합(京城出版勞動組合)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서울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경성철공조합(京城鐵工組合)·양화직공조합(洋靴職工組合)·급수부조합(汲水夫組合)·양말직공조합(洋襪職工組合) 등 5개 단체 대표자가 참석한 노동직공간담회에 경성인쇄직공조합 대표로 참석하였다. 8월에는 대동인쇄주식회사(大同印刷柱式會社) 문선공 30여 명의 파업투쟁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 집행위원 자격으로 사측과의 교섭위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동정금 모금 및 후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8월 4일 서울 지역 청년운동 10개 단체들의 회합에서 임시의장을 맡고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을 조직하였으며,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22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발기회에 염군사 소속으로 참석해 창립 멤버가 되었다. 9월 27일에는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제4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0월 4일 조선노농총동맹 주최 대강연회에서 「노동운동의 금후」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한양청년연맹이 주관하는 반(反)기독교대강연회 둘째 날인 10월 26일 「기독교의 미망」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2월 30일 열린 한양청년연맹 대의원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얼마 전 일어난 신의주사건(新義州事件) 때문에 한양청년연맹이 당국으로부터 해산을 명령받았으므로 새로운 청년운동 단체로 사회운동자협의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한 1925년 하반기에는 청년단체 연우사(鉛友社)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26년 초에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에서 3월 발행을 목표로 준비한 잡지 『청년의 성(靑年의 聲)』 편집 책임을 맡았다. 2월 7일 열린 경성청년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교양부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벽신문 발행 책임자로, 무산자 교육을 목표로 하는 교육강령 작성위원으로 선정되었다. 3월 7일에는 경성청년회 내 연구반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강연하였다. 5월에는 1923년 이후 중단된 잡지 『해방운동(解放運動)』을 속간시키고자 노력하며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21일 열린 정우회(正友會) 임시총회에 출석하였다. 한편 같은 해 5월 15일 신흥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제명되었다. 6월 16일 경성인쇄직공조합 제4회 집행위원회에서 서무부 상무위원이 되었다. 7월 23일 경성청년회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청년운동 단일화를 위한 청년단체 재조직화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10월에는 월간 잡지 『노동자(勞動者)』 발간 작업에 참여하였다. 1929년 4월에는 함흥청년동맹(咸興靑年同盟) 대회 개최를 둘러싸고 일제 경찰이 대회를 해산시키자 이에 저항하는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와 관련해 함흥경찰서에 붙잡혔다. 11월 2일 근우회 경성지회에서 「부인운동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30년 6월 15일 개최된 경성출판노동조합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 후보로 선정되었다. 6월 21일에는 중앙청년동맹(中央靑年同盟) 동구지부(東區支部) 정기대회에 참석하였다. 1930년 말부터 1931년에 걸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며 특별히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1930년 12월 초 집으로 찾아온 오성세(吳祘世)의 권유에 따라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朝鮮共産黨再建設準備委員會)에 가입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김이흥(金二興)·이옥동(李玉同) 등을 멤버로 한 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1월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左翼勞動組合全國評議會) 조직 준비회에 참가하여 정치부 담당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야체이카를 기반으로 좌익노동조합 조직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각 산업부문의 노동자 생활상태, 노동조건 등을 조사하기로 결의한 뒤 인쇄공장을 전담하였다. 2월 8일에는 좌익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선진노동자를 의식화 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이론을 선전할 출판물 『산업노동(産業勞動)』의 발간 책임을 맡았다. 3월 8일에 경성출판노동조합 제3회 집행위원회에서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회의를 진행하였으며 향후 개최될 정기대회 의안(議案) 작성위원으로 선정되었다. 4월 17일 평양출판노동조합이 주최하는 범사회문제강연회에서 「노동조합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한편 1931년 4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서기국으로부터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양창준(梁昌俊)과 함께 개성지부를 중심으로 카프쇄신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는가 하면 『군기(群旗)』 편집에 개입한 것 등이 조직을 파괴하는 음모라는 이유였다. 1931년 4월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용산경찰서에 의해 붙잡혔다.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거쳐, 1933년 4월 28일 기소가 확정되었다. 1934년 6월 25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1936년 7월 25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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