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덕
李在德1888. 4. 3 ~ 1961. 2.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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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4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신양면(新陽面) 가지리(加支里)에서 아버지 이용신(李容信)과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백부 이용진(李容震)과 백모 문화 류씨(文化柳氏)에게 출계해 가문의 대를 이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명(治明), 호는 수운(峀雲)이다. 부인 진주 강씨(晉州康氏)와 혼례를 치러 1남을 두었다. 유년기에 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같은 군 광시면(光時面) 신흥리(新興里) 김재정(金在貞)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917년 (음)6월경 광복회 충청도지부가 설치되고, 김재정의 아들인 김한종(金漢鍾)이 충청도지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7, 8월경 김한종이 광복회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권유하자, 여기에 찬성하고 가입하였다. 충청도지부 연락기관으로 미곡상이 예산·연기(燕岐)·인천(仁川)에 설치되었다. 이에 인천 부내면(府內面) 송현리(松峴里)로 이거하여 미곡취인소(米穀取引所)를 경영하며 광복회 거점으로 삼았다. 같은 해 (음)11월 임봉주(林鳳柱)가 중국에서 신채호 초안 「고시문」 원안을 몰래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김한종에게 전달하였다. 「고시문」에는 의연금 요구 이유 및 위반 시 처단 경고가 적혀 있었다. 1917년 (음)12월 초 김한종이 충남 홍성(洪城) 장곡면장이자 광복회원인 정태복(鄭泰復)에게 가서 등사할 것을 명하여 인천을 출발, 그의 자택에서 면사무소에 있던 등사판을 이용해 백지 198매에 「고시문」을 등사하였다. 이후 김한종 집으로 다시 가지고 오게 하였다. 김한종은 미리 숙부 김재풍(金在豊)에게 부탁해 ‘광복회지령원감독장(光復會指令員監督章)’, ‘제의안신인(濟義安信印)’, ‘변창희(卞昌曦)’라고 새긴 인장을 준비해 두었다. 다시 충남 예산 광시면 신흥리 김재철(金在哲) 집에서 김한종·김상준(金商俊)과 만났다. 홍성 금마면(金馬面) 김영년 앞으로 2만원을, 기타 자산가 90명에 대해 2천원 내지 1만원을 요구하는 출금액을 적어 봉투에 넣고 이를 휴대하고서 1917년 (음)12월 3일경 천안(天安) 성환면(成歡面)에 있는 장두환(張斗煥) 집에 갔다. 장두환의 집에서 그해 (음)12월 6일 김한종·김재창(金在昶)·황학성(黃學性)·임봉주와 함께 인천 미곡상에 모여 「고시문」에 첨부할 ‘주의사항’을 별지에 써 넣었다. 주의사항은 본회에서 지정한 분배금액을 (음)12월내에 준비하여 어느 때라도 본회의 청구에 응할 것 등 4항이었다. 같은 해 (음)12월 7일경 발송 준비를 마치고 장두환·임봉주·김재창 3인은 (음)12월 8일부터 10일 사이 서울에서 배당금액 총 177만 7천여 원이 적힌 161통의 「고시문」을 충청도 지역 소(小)자산가들에게 발송하였다. 그러나 1918년 1월 하순 김한종과 장두환을 필두로 충청도지부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2월 8일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공갈죄로 징역 1년(미결구류 150일 통산)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고향에서 훈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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