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大偉
大偉1896. 10. 12 ~ 1982. 10.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흥사단
- · 수양동우회
- · 고려기독교청년회
- ·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YMCA)
- ·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 · 기독신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 · 동우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서면(楊西面) 북성동(北城洞)에서 아버지 이항준(李恒俊)과 어머니 한옥오(韓玉五)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이명은 이원규(李元奎)이다. 1910년 평북 선천(宣川)의 기독교계 학교인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11년 10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던 중 탈출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1914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유학을 떠나 재정상업학교(財政商業學校)에 입학하여 1916년 8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9월 베이징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1920년 8월 졸업하였다. 베이징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0년 2월 10일 이용설(李容卨)·문승찬(文承贊)·장자일(張子日) 등과 함께 공리회(共理會) 예배당에서 고려기독교청년회(高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유학생의 어학교육과 숙식 주선, 지역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1년 3월 귀국 후 조선YMCA연합회 학생부 초대 간사로 취임한 이래 기독청년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24년 8월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조선YMCA연합회가 일본YMCA의 감독 하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세계YMCA동맹에 가입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5년 2월부터 세계YMCA의 후원을 받아 미국 예일대학교 사회학과와 콜롬비아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25년 5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1926년 12월 흥사단 제13회 뉴욕지방대회의 서기(書記)로 참석하였다. 1927년 8월 4일 다시 국내로 돌아온 뒤 흥사단 국내 조직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총무를 맡았다. 이후 이기태(李基台) 등과 함께 농촌운동 선전 및 농촌지도자 강습, 생활문제 개선 등에 관심을 가지고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회개조의 필요성과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는 강연을 진행하다가 붙잡히기도 하였다. 1937년 6월 제8회 전조선면려회 금주운동 실시 전 발송한 문구가 발단이 된 이른바 동우회사건으로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심을 거쳐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미군정청 노동부의 노동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정부 수립 이후 한국기독교청년회 회장, 재일공관 노동고문 등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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