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植
東植186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5)
관련 사건
- · 1919년 중화군 상원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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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5)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상원면(祥原面) 직현리(直峴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55세인 것으로 보아 1865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일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新邑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인 김성진(金聖鎭)이 중화군에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상원면 천도교인들은 3월 2일 상원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2일 아침부터 신읍리에서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날 일제 군경이 만세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일부가 체포되었다. 다음 날인 3월 3일에도 신읍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고, 여기에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오후 2시 무렵 천도교인들과 신읍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200여 명의 시위대는 신읍리 중심 지역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도중 전날 연행된 인사들을 탈환하기 위해서 시위대와 함께 천도교구실로 진입을 시도하였고, 오후 3시경에는 신읍리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오후 4시경 다시 집결한 시위대는 신읍리 일대를 행진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치열한 저항으로 급파된 일제 군경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를 받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독립정신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만국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로 식민지가 해방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국의 자유를 위해서 3월 3일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므로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4개월여의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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