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鳳
東鳳1894. 1. 27 ~ 1920. 11.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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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4년 1월 2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토계동(土溪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예안읍 장날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예안면 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한 인물은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었는데, 이시교(李時敎)·이남호(李南鎬)·이광호(李洸鎬) 등을 규합하여 3월 17일 예안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펼칠 것을 결정하였다. 주도 세력은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등사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함께 참여한 인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뜻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7일 아침, 태극기를 가지고 예안읍 장터로 향하였고 만세운동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 경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서 30여 명의 군중이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시장 주변에서 3개의 시위대가 장터 중앙으로 나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어서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를 본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이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주며 응원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주도자 체포로 군중들과 잠시 흩어지게 되었다. 오후 6시경 시위대와 함께 다시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분노한 시위대는 주재소를 포위하고 ‘구속자 석방’을 외쳤다. 시위대와 함께 구속자 탈환을 위하여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투석전을 벌이며 주재소 유리창과 문을 부수었다. 이를 본 일제 수비대가 달려와 총검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도자 25명과 함께 붙잡혔다. 조사 과정에서 “극형에 처해진다고 해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며 강경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현재 세계 각국이 민족자결주의를 시행하고 있는데 그 또한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평화를 주창하고 인도정의를 주장한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고 중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신청하였고,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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