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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達根

達根

1893. 9. 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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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達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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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성천(成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성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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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6)

관련 사건

  • · 광주군 광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6) 1893년 9월 9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숭인면(崇仁面) 창인리(昌仁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군(光州郡, 현 광주광역시) 광주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맹인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서광산정의 박춘도(朴春道)방에 거주하였으며 광주 자혜병원의 안마 고용인으로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개신교, 불교계 인사들과 학생대표들은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달함으로써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전남 광주에서는 이미 도쿄 유학생 정광호(鄭光好)가 2·8독립선언서를 광주 청년들에게 전달한 바 있었다. 광주면에 거주하는 청년 최한영(崔漢泳)·김복수(金福洙) 등은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한편 만세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서울의 개신교는 광주의 개신교인 최흥종(崔興琮)·김철[(金喆) : 본명 복현(福鉉)]에게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고종 장례에 참여차 서울에 갔던 김철은 서울 유학생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에 광주로 내려오자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3월 5일 밤 광주면 근처의 양림동(楊林洞)에 거주하는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는 숭일학교 교사 김강(金剛)·최병준(崔炳俊)을 비롯해서 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峰)·한길상(韓吉祥)·최한영(崔漢泳)·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圭)·서정희(徐廷禧) 등이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고 일반 시민·개신교인·광주 일원의 학생들을 독려해서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3월 10일 광주면의 소규모 장날을 맞이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시각장애인으로 독립운동 주도자들을 설득해 만세시위의 계획과 준비에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10일 만세시위를 주도한 최한영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으로 후세에 남을만한 일을 찾던 중에 만세시위를 계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 주도세력을 찾아 나섰다. 처음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만세시위의 계획에 참여하는 저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배척하였다. 하지만 만세시위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과 성실하게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시위 주도자들은 광주농업학교 기숙사로 가서 만세시위 계획을 전하고,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도록 하였다. 만세시위 당일에는 일정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구역장의 임무를 맡았다. 3월 10일 오후 3시 무렵,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만세시위가 시작될 무렵 1,000여 명의 군중이 밀집해 있었으며, 양림동에서는 개신교인들과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 재학생들이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지산면 인근에는 범일두와 이주상 등 수백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고자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 주도세력의 일원으로 일정 지역의 독립선언서의 배포를 맡은 구역장으로 인력거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휴대한 채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 관련 노래를 부르면서 광주면의 큰 도로로 진출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서에 도달하자 일제 군경과 기마경찰은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경찰서로 자진해서 들어간다고 외치면서 경찰서 경내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를 하고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현장에서 시위 주도자와 적극 가담자를 체포해 연행하였다. 당일 현장에서 인력거를 타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이유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그러자 “어머니를 마중 나가기 위해서 인력거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에 누군가 인력거 안으로 독립선언서를 넣었으며, 그 후에 경관이 인력거 안의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대구복심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10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고등법원에서는 죄를 감경받기 위해서 본인의 행동을 부인하였지만, 3월 10일 광주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최한영의 증언을 보면 만세시위의 준비와 실행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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