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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南鎬

南鎬

1882. 4. 24 ~ 193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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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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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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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2년 4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온혜동(溫惠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이후 본적지인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서부동(西部洞)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당시 예안면 면서기였다. 같은 해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 예안읍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면장 신상면(申相冕)으로부터 만세운동을 제의받게 되었다. 3월 11일 저녁 9시경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신상면과 면서기 이광호(李洸鎬)·이중원(李中元), 잠업(蠶業) 순회교사 이시교(李時敎)·신응두(申應斗) 등을 만나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이광호가 거사일을 다음날로 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모인 사람들 모두 시일이 촉박하다고 하여 논의 끝에 3월 17일 예안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비밀리에 만나 구체적인 만세운동을 논의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옮겨적으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때 안동 소재 유림과 예안 만촌교회 기독교신자들도 3월 17일 예안읍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3월 17일 당일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예안읍 장터로 향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미리 계획한 대로 예안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서 군중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에서 군중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조수인(趙修仁)이 이끄는 유림과 신흥한(申應漢) 등의 기독교도도 일제히 장터 중앙으로 뛰어 나와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만세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일제 경찰은 수비대를 동원하여 군중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동봉(李東鳳)과 함께 군중은 이끌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군중에 수비대는 폭력을 휘두렀고, 그 과정에서 다른 주도 인물 15명과 함께 붙잡혔다. 그러자 시위대도 일시적으로 해산하였다. 이후 군중은 다시 모여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오후 6시경 다시 모인 군중은 이시교와 안병극(安炳極)을 선두로 경찰관주재소로 가서 격렬한 투석전을 펼친 후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25명이 체포되고 조수인 등이 수비병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다. 1919년 5월 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예심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그해 6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무죄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될 때까지 3달 여 동안 고문과 옥고를 견뎌야 했다. 이후 1921년에 또다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다. 흠치교(吽哆敎, 일명 증산교[甑山敎])에 입교해서 겉으로는 포교를 표방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 중국 상하이(上海)에 위치한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 마련하였다. 스스로 10원을 출금하였고 마을 사람들에게 치성비(致誠費) 명목으로 모금을 하여 이를 임시정부로 보내려고 하였다. 사건이 발각되면서 1921년 6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922년 2월 27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모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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