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奎泰
奎泰1880. 2. 7 ~ 1941. 2.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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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4) 1880년 (음)2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대박리(大朴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규태(圭泰)라는 이름이 있으며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5일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부터 정산시장에 나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일제는 헌병들을 즉각 출동시켜 만세시위의 해산 명령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장날이었던 정산시장에 나왔다가 일제 헌병이 만세시위자들을 강압적으로 연행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연행된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대신하여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였다. 그의 지휘에 따라 700여 명의 만세시위대와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갔다.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망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황망함 속에 해산되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정산면의 만세시위는 다음날 목면(木面)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갔다. 연락을 받고 온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운구에 참여하였다.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행렬의 선두에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앞세웠다.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목 마다 많은 주민들이 운구행렬에 합류하여 1천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운구행렬이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부터 ‘독립만세’라고 쓰인 종이 깃발이 배포되고, ‘독립만세’가 연창되면서 운구행렬과 만세시위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운구행렬이 만세시위대로 전환되자, 일제는 그것의 해산을 위해 정산 외에 공주(公州)의 헌병까지 지원 병력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파견나온 일제 헌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동하는 권흥규의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로 발포하였다. 이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든 권영진(權寧鎭), 상여꾼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는 흩어지게 되었다. 이날의 운구시위 이후 일제 헌병의 참여자에 대한 조사, 색출과정에서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즉결심판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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