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덕
尹昌德187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의주군 가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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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가산면(加山面) 도령동(都嶺洞)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당시 나이가 44세로 기록되어 있어, 1876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5일 의주군 가산면 도령동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의주군에서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의주 동교회(東敎會)에서 시무하던 유여대(劉如大) 목사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3월 1일 의주면(義州面) 홍서동(弘西洞)의 서부교회(西部敎會)에서 1,000여 명의 기독교인와 천도교도 등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가(獨立歌)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일과 3일에도 기독교인와 양실학교(養實學校) 학생을 비롯하여 천도교도 1,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4일에는 의주군 비현면(枇峴面) 체마동(替馬洞) 장날을 맞이하여 1,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의주군의 만세운동은 3월 15일을 기점으로 다시 일어났다. 기폭제가 된 것이 광평면(廣坪面) 상광동(上廣洞)과 가산면 도령동의 만세운동이었다. 이날 광평면 상광동에서는 오후 2시 경 조선총독부 광무과(鑛務課) 출장소 부근에서 2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시에 가산면에서도 고종의 통곡제(慟哭祭)를 한다는 명분으로 만세시위가 계획되었으며, 일부 주민들은 도령동의 교회당(敎會堂)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만세시위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도령동에 거주하는 윤재하(尹宰河)의 집에 결혼식이 있어 이를 참관하느라 약 2시간 늦게 참여하였다. 만세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이때 가산면 헌병보조원과 순사보 등이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를 향해 갑자기 총을 쏘며 칼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시위대 수백 명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동생 윤창의(尹昌意)와 다수의 참여자가 부상당하였다. 이를 목격하고 격분한 시위대와 함께 헌병 보조원 1명과 순사보 1명을 사로잡아 무기를 빼앗고 구타하였으며, 헌병보조원 1명 등을 붙잡아 점령한 파출소에 묶어두기도 하였다. 이후 헌병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1919년 6월 1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상고하였고, 1919년 7월 28일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고 다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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