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壽興
壽興1905. 9. 11 ~ 1929. 2.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동소문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905년 9월 11일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읍내면(邑內面) 창전리(倉前里)에서 부친 이일형(李日瑩)과 모친 연안(延安)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이명으로 성조(成槽)·좌성(佐聖)·성단(成檀) 등을 사용하였다. 이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한문을 배우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였다. 1915년 서울로 이주하여, 1918년 4월 어의동(漁義洞) 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고 1919년 4월 8일 다시 자퇴하였다. 이후 3년 동안 이천군 백사면(栢沙面)의 원적산(圓寂山)에서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23년 대화정(大和町, 현 서을특별시 중구 필동 일대)에 위치한 안등사진통신사(安藤寫眞通信社) 사원으로 일하며 사진 판매업에 종사하였다. 1923년 3월 만주 콴뎬현(寬甸縣)으로 갔다. 이때 대한통의부원 이운봉(李雲奉)에게 밀정으로 오인받아 체포되어 통의부 분대장 김용보(金龍甫)에게 호송되었다가 채상덕(蔡相德)이 부친과 친밀했었다며 변명해준 결과 밀정 혐의가 풀렸다. 같은 해 7월 대한통의부에 참여하였고, 지린성(吉林省) 애무현(額穆縣) 신명무관중학교(新明武官中學校)에 입학하여 1년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이후 통의부 민사부 외무원으로 임명되어 주민이 내는 군자금 등을 수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2개월 후 사임하였다. 1924년 7월 초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참여하여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었다. 지린성 환런현(桓仁縣)과 지안현(輯安縣) 경계에 있는 뇌자구(磊子溝)에 주둔하며 내무를 관장하였다. 1925년 2월 27일 이른바 ‘고마령참변’에서 왼쪽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부상을 회복하고, 1926년 4월 중순 퉁화현(通化縣)에서 권총 2자루와 탄환 980정을 찾아, 같은 해 5월 중순 국내로 들어갔다. 사흘이 걸려 평북에 도착하여 산중에서 모젤 권총과 장총을 맨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 부사 권영태(權永泰) 일행을 만났으나 개인 행동을 취하기로 하고, 20여 일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해 7월 6일 밤 황해도 평산군(平山郡)에서 군자금 모집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7월 10일이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이천으로 갈 계획으로 동소문으로 향하던 중, 7월 10일 밤 10시 50분경 동소문파출소 순사 도쿠나가(德永勝次)가 뒤를 따라왔다. 옷 밖으로 나온 총신을 보고 순사가 따라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어두운 곳에 잠시 서서 권총을 꺼내어 오른손에 가지고 뒤를 보았다. 순사는 파출소를 향하여 걸어갔으나, 자신에 대하여 파출소에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러 돌아가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순사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파출소 입구에서 소리를 쳤다. 순사가 이에 반응하여 무엇이냐라고 묻자 본인을 독립단원이라고 밝히고, 순사를 향하여 권총을 쏘았다. 순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계속하여 권총 여섯 발을 쏜 후 북한산으로 피신하였다. ‘동소문 사건’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1926년 9월 5일 오후 7시 반 고향 이천에 거주하는 외사촌 유남수(柳南秀)·유택수(柳澤秀)와 함께 경기서 안성 부호 박승육(朴承六)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박승육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이 자선 사업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군자금 모집 제안에 동의할 것으로 판단하여 박태병을 만났다. 박태병에게 독립단 참의부원임을 밝히고,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므로 이에 협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박태병이 거절하자, 박태병을 살려두었다간 군자금 모집 시도 사실이 누설될 것을 염려하여 박태병을 권총으로 쏘았다. 1926년 9월 28일 오후 3시경 여주군(驪州郡) 흥천면(興川面)에 거주하는 여주 지역의 자선사업가 이민응(李敏應)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였다. 이민응이 4원을 내면서 빈민 구제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자, 이를 받지 않고 돌아왔다. 후에 이민응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같은 해 10월 20일, 이민응의 회사인 현방(玄方) 식산주식회사로 가서 군자금을 모집을 시도하였으나 체포를 우려하여 우선 주재소 순사를 처단한 후 다시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주재소로 가서 순사를 향해 총을 쐈으나 순사는 이미 도망간 후였다. 곧바로 백사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서기가 강도라고 소리를 치자, 면서기를 처단하였다. 은신하던 중, 1926년 11월 6일 6촌형 이준성(李俊聖)의 밀고로 이천경찰서에 붙잡혔다.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공갈미수살인죄·살인미수죄·강도죄·살인죄 등으로 사형을 받았다. 1929년 2월 27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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