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冕奎
冕奎1886. 8. 2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해주군 검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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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7) 1886년 8월 25일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천동면(泉洞面) 석탄리(石灘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생선판매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4월 8일 해주군(海州郡) 검단면(檢丹面)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 등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천도교·개신교·불교계 인사들과 학생대표들은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동시에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해주군에는 3월 1일에 이미 기독교도들을 통해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준비 소식이 전달되어 있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남본정(南本町) 예배당에는 170여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목사 오현경(吳玄卿)은 고종 봉도식을 마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그리고 그날 모인 신자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 독립선언의 사실을 널리 전파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날 이후 해주군 각 지역에서는 만세시위가 추진되었다. 4월 8일 오후 9시경 검단면 온천리(溫泉里) 이목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온천리는 검단면의 면소재지로, 온천리에 위치한 이목(梨木) 시장은 지역 일대 농산물 집산지였다. 오성칠(吳聖七)·최만원(崔萬元) 등과 함께 이목시장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가 발발하자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고 시위대에 나누어 주었다. 3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이목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주재소 건물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심 재판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1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매국관리에 의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 불만을 갖던 중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로 약소민족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행위로 징역형을 받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며 상고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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