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식
李鍾植1917. 9. 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무명그룹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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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0) 1917년 9월 4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춘천읍(春川邑) 화원정(花園町)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인봉(李仁鳳)이다. 1930년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후, 이홍채(李鴻采)·신영철(申瑛澈)·박우홍(朴禹弘) 등과 함께 민족주의 관련 문헌을 탐독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1935년 3월 졸업 후 대부분 면서기가 되었는데 이때 춘천군 신북면(新北面)의 면서기로 취직하였고, 이후에도 자주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가 1936년 8월 자택에서 회합할 때 이홍채가 “현재의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조선 민족은 타락하고 있다”며 “민족을 개조해서 그 지위 향상을 도모하여 조선을 독립시키고 장래 세계를 통일하여 대민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적극 찬성하면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고, 귀농 후 계몽운동에 종사하여 농민들에게 민족주의를 주입시키기로 하였다. 또한 일요일·제일(祭日)·공휴일에 만나 이러한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결의하고 비밀결사 ‘무명그룹’을 조직하였다. 그 뒤 1937년 9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집 뒷산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때 이홍채가 “조선 민족은 단결심과 희생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희생정신의 양성이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신영철은 “우리 조선 민족이 현재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사리사욕을 초월해야 하고, 또한 조선 고유의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동조하면서 실행을 위한 구체적 행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1938년 3월 춘천읍 전평리 수원지 부근에서 모임에 참석하였다. 농촌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귀농과 자신들을 수양할 방법으로 조선어학회에서 발행한 잡지 『한글』을 구독하기로 결의한 뒤, 면서기를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같은 해 9월 동지들과 더불어 후배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상록회(常綠會) 멤버들과 함께 토론회를 열거나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선의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 있기 때문에 우리들 지식 계급이 농촌으로 돌아가 일반 농민들에게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연설을 하였다. 1938년 10월 중순경 우두산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고 회명과 회칙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다른 동지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당장 이를 시행에 옮기지는 못하였고, 다만 이를 위한 논의를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활동을 지속하다가 같은 해 10월 하순 경 춘천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고, 1939년 4월 19일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그리고 1940년 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약 6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다. 광복 이후 1950년 9월 20일 춘천에서 퇴각하는 북한의 보안 요원에 의해 강제 피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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