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圭昌
圭昌1913. 3. 28 ~ 2005. 8.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남화한인청년연맹
- · 흑색공포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
- · 이용로처단사건(李容魯處斷事件)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913년 3월 28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현(通化縣) 삼원보(三源堡) 합니하(哈泥河) 언덕의 토방(土房)에서 아버지 이회영(李會榮)과 어머니 이은숙(李恩淑)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이유승(李裕承)으로 이조판서와 의정부참찬을 지냈으며, 할머니 정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祖淳)의 딸이다. 아버지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경주이씨대동보(慶州李氏大同譜)』에 따르면, 선대는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로 10대조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다. 본명은 이규호(李圭虎)이며, 호는 소산(嘯山)이다. 출생 직후에는 ‘계백’이라는 아명으로 불렸는데, 이회영이 계백장군을 만나 무엇인가를 받는 꿈을 꾼 후 부인에게 아들을 낳을 것 같으니 이름을 계백으로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소산이라는 호는 상하이(上海) 시절에 지은 것이며, 본명이 규호인 것은 집안이 돌림자로 규용(圭龍)·규학(圭鶴) 등 동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감 중에 어머니가 ‘호랑이(虎)가 우리에 갇힌(圭) 형국’이라는 말을 듣고 호를 창(昌)으로 바꿨다고 한다. 출생 후 6개월만인 1913년 10월 만주에서 갓 정착한 집을 마적이 습격하여 어머니가 총격을 당하는 과정에서 안면(顔面)과 손이 숯불 화로에 닿아 화상을 입었는데, 평생 상처로 남았다. 어려운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정규교육을 받기 어려웠으나 1926년경 허베이(河北)의 명문인 텐진(天津) 남개학교(南開學校)에 입학하였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하던 교장 장보링(張伯玲)의 배려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베이징(北京)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의열단(義烈團)이나 다물단(多勿團) 등 여러 단체의 연락과 전언(傳言) 등의 심부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1932년 11월 부친이 다렌(大連)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에서 모진 고문 끝에 뤼순(旅順)감옥에서 사망하자 적극적인 의열투쟁에 나섰다. 1932년 12월경 부친을 밀고한 인물의 처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회영이 사망한 후 정화암(鄭華岩) 등은 일제에 밀고한 친일 분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회영이 작별인사차 중형(仲兄)인 이석영(李石榮)을 찾아갔던 자리에 함께 있었던 연충열(延忠烈)과 이규서(李圭瑞)가 문제의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항일투쟁을 위한 새로운 청년단체 조직이 필요하며, 김구(金九)도 이 제안에 적극 찬동하였다고 속이고 두 사람을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유인하였다. 백정기(白貞基)와 엄형순(嚴亨淳)과 함께 죄상을 자백받은 뒤 처단하였다. 1933년 2월 상하이(上海)의 프랑스조계 원심창(元心昌)의 집에서 원심창의 권유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능통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에 글을 쓰기도 하고, 선자(選字)와 인쇄작업을 담당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에도 참여하였다. 2월 5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내 정원방(亭元坊)에서 개최된 거사를 준비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였다. 거사 당일에는 원심창과 함께 육삼정 외곽에서 현장 상황을 살피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1935년 1월 20일 이달(李達)·정화암·김지강(金芝江)·엄형순 등과 함께 상하이 보고리(步高里) 194호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자금 조달을 위해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습격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조상섭은 백삼 장사를 통해 돈을 많이 모았으나, 친일 행적을 들어내 독립운동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다음날인 21일 정화암으로부터 권총 1정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조상섭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조상섭이 집에 없어 거사에는 실패하였다. 대신 그의 부인을 위협하여 백삼(白蔘) 70근을 확보하였다. 백삼 가운데 50근은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서 동지 허열추(許烈秋)와 장도순(張道順)의 도움을 받아 처분할 수 있었다. 1935년 3월 25일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부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였다. 이용로는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를 주도하면서 상하이주재 일본총영사관과의 협조하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체포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거사 당일 엄형순과 함께 이용로가 거주하던 상하이 적사위로(狄思威路) 유신리(裕新里) 16호를 습격하여 엄형순이 이용로에게 권총 2발을 발사하여 거사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총격 이후 엄형순이 이용로의 부인 박성신(朴聖信)의 완강한 저항과 이웃집에 거주하는 박숭복(朴崇福)의 합세로 수세에 몰리자, 근처 야채시장에서 망을 보다가 달려와 현장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소동이 확대되면서 출동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인도되어 1935년 5월 30일 아침 상하이에서 인천항을 거쳐 국내로 이송되었다. 이송된 후에는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 1936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어, 인쇄공으로 사역하였다. 수감 중이던 1939년 4월 감옥에서 알게 된 사회주의자 박세영(朴世永)과 함께 일제의 중국 침략을 규탄하는 선전문을 감옥 내외에 배포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이 추가되었다.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7년 남화한인청년연맹 동지였던 김지강과 상하이·베이징·텐진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석규(李錫奎)·공형기(孔亨基)·차이혁(車利爀) 등과 함께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종로경찰서 소속의 일본인 사이가(齊賀七郞)를 처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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