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誠宇/李成宇

誠宇成宇

1900 ~ 1929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誠宇/李成宇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중국의열투쟁

지도 위치

광역 지역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중국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의열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밀양폭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중국 지린성(吉林省) 둥닝현(東寧縣) 사오쑤이펀(小綏芬)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900년생으로 추정된다. 원적은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송하면(松下面) 송하리(松下里)이다. 활동 관련 자료에는 모두 이성우(李成宇)로만 표기되어 있고, 가명은 이동소(李同韶)였다. 결혼하고 얼마 후인 1918년에 펑티엔성(奉天省) 퉁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무관학교가 지린성 류허현(柳河縣) 구산쯔(孤山子)로 이전한 뒤인 1919년 여름에 입학해 온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이종암(李鍾岩)·서상락(徐相洛)·강세우(姜世宇) 등 여러 동학들과 함께 상의하여 뜻을 모아 지린으로 가서, 같은 해 10월부터 성(城) 밖의 한 중국인 집에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 11월 10일 동지 9명과 함께 청년결사대 조직인 의열단(義烈團) 창립에 동참하였다. 의열단은 총독통치 하의 일본인 고관과 한국인 민족반역자 부류, 식민지 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 및 부속 시설물을 겨냥한 고강도의 '암살파괴운동'을 전개할 것을 활동목표로 삼았고, 제1차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경기도경찰부 등 주요 일제기관 투탄 폭파와 요인 암살의 특공거사를 감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창립단원 전원이 동참할 이 계획의 추진을 위해서는 폭탄 구득이 급선무였기에, 1919년 11월 중순 김원봉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가서 프랑스조계 보창로(寶昌路) 보강리(寶康里) 김대지(金大地)의 집에 유숙하면서 폭탄 구입에 힘썼다. 이 무렵 김원봉·곽재기(郭在驥)·강세우·김기득(金奇得, 본명 金台熙)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1920년 3월 한 중국인으로부터 폭열탄(爆裂彈) 3개 제조용 폭약과 탄피 등을 구입하여 김원봉·곽재기·김기득과 함께 김대지의 집에서 조립하여 포장한 후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으로 우송하였다. 곧이어 안둥으로 가서 이낙준(李洛俊)의 집에서 황상규(黃尙奎)·곽재기·김기득·윤소룡(尹小龍) 등과 함께 폭탄의 국내 밀반입 방책과 국내상황 조사 및 자금변통에 관해 의논하였다. 그 후 다시 상하이로 내려가, 같은 해 4월 초순 중국인 은익삼(殷益三, 일명 뚜완이산(段益山))에게 은화 230원을 주고 폭열탄 13개(7개는 도화선식, 6개는 투척식) 제조용의 탄피·화약과 미제 권총 2정, 탄환 약 100발을 구입하였다. 그것들을 의류상자에 담아 수하물로 위장한 뒤 이륭양행(怡隆洋行) 기선인 계림환(桂林丸) 편으로 안둥현으로 갖고 가서 이병철(李丙喆)에게 넘겨주고 국내로 밀송토록 하였다. 이어 지린으로 가서 곽재기를 만나 그 사실을 알리고 둘이 함께 안둥현을 거쳐 그해 5월 13일 서울로 잠입한 뒤 공평동(公平洞)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거처를 잡았다. 폭탄거사 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용만 조달되면 여러 동지와 함께 결행할 작정이었다. 1920년 6월 들어 김원봉의 조속 결행 지시를 전하러 서울로 들어온 이낙준을 곽재기·황상규·김기득 등과 함께 만났고, 이에 따라 2차 반입 폭탄의 관리자인 부산(釜山)의 이일몽(李一夢)에게 폭탄을 즉시 서울로 갖고 오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달 16일 은신처인 인사동(仁寺洞) 김낙계(金樂桂)의 집에서 단원 중 맨 처음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의열단의 거사계획을 첩지(諜知)한 경기도경찰부 경부(警部) 김태석(金泰錫)이 밀정 김진규(金珍奎)를 이용하여 거처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체포 후 8개월여 동안 혹독한 고문이 수반된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발물취체규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복역 중 장기수인 김재봉(金在鳳)·이민환(李珉煥)·김용복(金龍福) 3인과 함께 탈옥을 공모하고, 1922년 8월 20일 밤 11시경 김용복이 거짓 자살극을 벌이자 달려온 간수부장과 당번간수를 구타하여 격투를 벌였다. 그 사이에 이민환·김재봉이 탈옥 도주하였으나 김용복과 본인은 탈주에 실패하여 징역 2년이 추가되었다. 그 즉시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옥중 생활을 하던 중 복막염과 늑막염을 3년간 앓았고, 일부 감형으로 1928년 3월 8일 만기 출옥하였다. 몹시 쇠약해진 때문에 그 즉시 밀양으로 내려가 요양하다 1년 만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