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秀
東秀1883. 12. 8 ~ 1944. 4.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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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83년 12월 8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마산면(馬山面) 청정리(靑亭里)에서 이매관(李每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이완용(李完用) 처단 의거에 참여하였다. 1909년 11월 이재명(李在明)을 비롯한 평안도(平安道) 출신의 지사들이 매국의 원흉인 이완용과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평양(平壤)에서 친일파 처단을 위한 준비를 추진하던 중, 그 해 12월 4일 일진회가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2월 6일 박태은(朴泰殷)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이재명·박태은·김정익(金貞益)·이응삼(李應三)·전태선(全泰善) 등과 회동하여 논의하던 중 이재명이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주장하였고, 토론 끝에 이완용과 이용구(李容九)를 동시에 처단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12월 7일 이재명·김병록(金丙錄)과 함께 이완용 처단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12월 12일 거사 실행을 위해 이재명·김정익·전태선 등 동지들과 서울로 올라왔다. 12월 17일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갖고 이완용을 먼저 처단한 뒤, 이용구를 나중에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과 동시에 각자 무기 분배를 마치고 김용문(金龍文)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후 김용문으로부터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12월 22일 오전 종현(鍾峴)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이재명·김병록과 함께 천주교회당 앞으로 갔다.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이완용을 급습한 뒤, 김병록과 함께 피신하여 동지들에게 상황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궐석재판에서 징역 15년을 받았다. 도피 중에도 원산 방면에서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하여 이완용의 동정을 살폈으나 경계가 엄중하여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름을 바꾸고 유기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며 평양에서 은신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해 4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회(國民大會)에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10월 15일 평양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2월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이완용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재판이므로 공개된 법정에는 많은 인파가 참석하였으며, 이인(李仁)·탁창하 (卓昌河)·김명진(金明鎭)·김병우(金秉禹)·하라야마(平山利治) 등 5명의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다. 1925년 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모살미수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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