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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俊久

俊久

1867 ~ 1940.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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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俊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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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일(迎日)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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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 오덕리(吾德里, 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 오덕리)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67년생으로 추정된다. 전 정언(前正言) 이능복(李能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국보(國甫), 이명은 이준구(李濬久)라고도 하였다. 1896년 6월 경기도 이천 의병부대의 김하락(金河洛)이 남한산성에서 경군(京軍)에게 패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부대는 경북 경주(慶州)지역으로 내려와 경주 의병부대와 함께 경주연합 의병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때 입진하여 대장 김하락의 휘하에서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경주연합 의병부대는 조직을 정비한 뒤 1896년 6월 17일 경주성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 다시 영덕(盈德)을 공략하기 위해 같은 해 7월 12일 소모장 이채구(李采久)와 함께 선발대를 이끌고 영덕에 도착하였다. 7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관군과 일본군을 대상으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다가 김하락이 중상을 입고 강물에 투신 자결하자 의병부대는 흩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대하는 의병투쟁이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06년 봄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불리는 의병부대가 일어났다. 이때 형 이한구(李韓久)와 함께 부대에 입대하였는데, 이한구가 중군장에 올라 부대를 주도하자, 집포장(戢炮長)으로 활동을 펼쳤다. 산남 의병부대는 영해(寧海)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연락하며 당초의 목표인 관동(關東)으로의 북상을 꾀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략으로 계속 길이 막혔다. 1907년 10월 7일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巖)으로 북상하던 중 일본군 수비대의 급습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를 비롯해 형 이한구, 중군장 이순구 등 많은 장령들이 전사하였다.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를 대신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07년 12월 정환직인 일본군에 잡혀 순국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최세윤(崔世允)이 정환직을 계승해 부대를 이끌었으나 1908년 7월 장기군 용동에서 체포되면서 부대는 해산의 길을 걸었다. 산남 의병부대에서 집포장으로 활동하다 잡혀 옥고를 겪던 중 탈출에 성공하여 귀향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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