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錫庸
錫庸1877. 11. 29 ~ 1914. 4.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77년 11월 29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상동면(上東面) 삼봉촌(三峰村)에서 봉선(鳳善)과 조양임씨(兆陽林氏)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아명은 갑술(甲戌)이다. 부녕김씨(扶寧金氏)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겸재(謙齋) 김관술(金觀述)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忠義)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다. 부친이 골패로 소일하자, “아버지가 잡기를 하면 자식은 어찌 하란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날 이후로 부친은 죽을 때까지 잡기(雜技)를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비범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언행을 보였다. 8세에 비로소 글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한 번 읽으면 대부분 암송할 정도로 영특하였으며,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1895년 (음)8월 을미사변이 발생하였고, 이어 일제가 단발을 강요하자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비분강개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구국 행동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스승이자 장인인 김관술이 측은한 마음만으로는 군부의 위급함을 구할 수 없으므로 학문 연마에 더욱 정진해야 한다고 타이르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1896년 (음)3월부터 공산촌(公山村)에서 6~7명의 동학과 같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북쪽으로는 남한산성에 올라 삼학사(三學士)의 충렬(忠烈)을 추상(追想)하고, 남으로는 진주(晋州)에 가서 삼장사(三壯士)의 장쾌한 사적에 조위를 표하였다. 1897년 (음)8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鎭安)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 연마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경향(京鄕) 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다. 예컨대,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간재(艮齋) 전우(田愚),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등을 만나 학문적 세계관과 구국의 방편을 논의하였다. 특히, 면암과 연재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송병선은 정재(靜齋)라는 호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높은 학문과 식견을 가진 거유들과의 담론을 통해 충의를 우선시하는 출처관(出處觀)과 시국관을 정립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통감부를 설치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또다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 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태인의병(泰仁義兵)이 대표적이었다. 태인의병에 가담하려 하였으나, 열흘 만에 해산되는 바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거사 준비에 동분서주하며 고광수(高光秀)·이평해(李平海) 등과 수시로 상의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이루어지자, 1907년 8월 하순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집안에 알리자, 문중 어른들은 3대 독자인 지중한 몸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거사로 인해 가족이 일제 군경으로부터 받을 피해를 우려하여 가족을 여러 곳에 나누어 피신시키고 가산을 정리해서 만일에 대비하였다. 곧이어 비록 한미한 선비이나 왜적을 물리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집을 떠나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섰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임실 상이암(上耳菴)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무기를 조달하는 한편, 사방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무기를 수습하여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하였다. 마침내 1907년 (음)9월 12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을 결성해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곧바로 의병부대의 부서를 정하였는데, 대체로 임실을 비롯한 전북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유생들이 지휘부를 형성하였으며, 병사층은 주로 농민들과 일부 천민들로 구성되었다.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주로 호남창의소를 표방하였다. 고천제(告天祭)를 지내며 맹세하기를, “우리의 동맹 일체는 국가와 군부(君父)의 만세(萬歲)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이며, 충성은 공(公)이고 효도는 사(私)이니 만약 두 마음을 품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이들은 의병부대를 결성한 지 하루 만인 (음)9월 13일 진안읍을 공격하여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하였으며, 일본어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하였으며, 군율을 엄히 하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첫 번째 출진에서 큰 성과를 거둔 후 용담(龍潭)의 심원사(深源寺)를 거쳐 숭암사(崇巖寺)에서 주둔하였다. 이때 인근에서 활동 중인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가 합진(合陣)을 요청해왔다. 이에 용담의 대벌평(大筏坪)에서 합진을 논의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선봉장 박만화(朴萬華)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전북 남원(南原)과 경남 함양(咸陽) 등 지리산 자락을 전전하였다. 당시 이들은 겨우 군사 20여 명과 총기 10여 정, 창 4자루가 전부였다. 지리산으로 이진한 것은 창평(昌平)에서 구례(求禮)로 이동해 온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고광순 의병부대도 1907년 10월 구례 연곡사(鷰谷寺)에서 기습을 당해 고광순 이하 수십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은 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의병부대가 연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초창기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정처없이 떠돌며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습하며 의병부대의 정비에 노력하던 중, 용담 화암(華巖)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때 중상을 입은 선봉장 안관서(安寬瑞)를 민가에 맡겨 치료를 부탁한 후 일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광주(光州)의 기우만과 태인의 임병찬 등을 만나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907년 (음)11월 중순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투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전투 능력이 있는 의병 모집과 무기의 구득 및 성능 향상에 노력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의진약속(義陣約束)」 14개 조 가운데 2개 항이 무기의 성능 개선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1908년 4월 해산군인 출신으로 선봉장으로 활약한 최덕일(崔德逸)과 윤정오(尹正五)가 화승총을 관타식(管打式)으로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다. 또한 일본세력의 구축, 일본 상품 배격, 인물 본위 모병, 무기 제조 기술자 영입, 푸른색 군복 착용, 간략한 군례(軍禮),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처단, 엄격한 군율 적용, 민폐 근절 등을 강조하며 의진의 전열을 정비하였다. 「의령10조」에서는 근왕사(勤王事), 정명분(正名分), 안민심(安民心), 족군용(足軍用), 출기계(出器械), 정공상(定功賞) 등을 내세우며 의병부대 강화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전북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친일 활동을 일삼는 일진회원을 처단하였으며, 공전영수원 등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나 세무서 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의병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위단 활동을 금지시키고, 가짜 의병 및 탐학을 일삼는 관리 그리고 의병 배반자들도 징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은 부호가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 해결하거나 일본 군경으로부터 빼앗은 노획품, 그리고 면장이나 공전영수원 등이 거두어들인 세금을 빼앗아 충당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납세 거부 투쟁을 병행하였다. 특히 1908년 (음)9월부터 1913년 (음)7월까지 의병부대를 후원한 후원자의 이름과 거주지, 금액, 물품 등을 낱낱이 기록한 「불망록(弗忘錄)」을 남겼다. 하지만 의병투쟁은 1909년에 들면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장기 항전으로 인해 의병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일제 군경의 탄압이 갈수록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귀순을 권유하며 회유하는 한편,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토벌대를 집중적으로 편성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심지어 일제 군경은 누이를 불법으로 구금·협박하며 거처를 파악하려 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군 14연대장 기쿠치(菊池) 대좌는 시세를 들먹이며 귀순을 하면 후하게 대우할 것이라며 적극 회유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전국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과 통문,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과 친일 단체에 보낸 수많은 글에서 거의(擧義)의 정당성을 천명하며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제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자, 전북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은 1908년 (음)12월 하순 순창(淳昌)의 모처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1909년 (음)2월 하순에도 신보현(申保玄) 등과 전라남도 장성(長城)의 백양사(白羊寺)에서 만나 향후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수비대와 헌병대, 경찰 뿐만 아니라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단체까지 동원하여 체포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그 해 (음)3월, 3년에 걸친 의병 활동을 접고 후일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 의병을 해산한 후 잠복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병탄된 후 (음)11월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한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거나 애도하는 글을 지어 추모하는 활동을 전개하며 결의를 다졌다. 전북 임실군 상동면 지의동(知義洞)의 동쪽 용동(龍洞)에 은밀히 의령단(義靈壇)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임실 운현 전투가 벌어진 장소인데, 그곳에다 의병 활동 중 전사하거나 붙잡히거나 사망한 장졸의 신위를 모신 것이다. 이를 제2금산의사총(錦山義師塚)이라 불렀다. 의병장 전해산을 비롯한 48인의 신위(神位)를 모신 영단(靈壇)이었다. 이른바 의령단(義靈壇) 설치 운동을 통해 새로운 결의를 다짐한 후, 1911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일왕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이 여의치 않자,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밀맹단(密盟團)을 결성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의 항일지사들과 연계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 밀맹단은 구례의 정찬석(鄭贊錫)을 비롯하여 하동(河東)·곡성(谷城)·남원·전주·임실·진안 등의 동지 약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을사5적과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 등지의 방화, 그리고 중국 망명을 추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하였던 친구의 배반으로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10월에 붙잡히고 말았다. 1914년 2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방화상해죄, 모살죄, 강도죄, 강도상인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4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같은 달 28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저술로는 『대한의장 호남창의록』과 『정재선생문집』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