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麟
相麟1856. 1. 1 ~ 1946. 3.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교부식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홍주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56년 1월 1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우성면(牛城面) 보흥리(寶興里)에서 아버지 이순학(李舜學)과 어머니 칠원 윤씨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자는 인서(仁瑞), 호는 만오(晩悟)이고, 이명은 이상규(李相珪)이다. 어려서 강진규(姜瑨奎)와 윤치중(尹致中)한테 한학을 배웠으며, 뒤에 전우(田愚)의 문하에 출입하여 견문을 넓혔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후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복한(金福漢)의 연락을 받고 의병에 참여하였다. 김복한의 거병은 1895년 (음)12월 1일에 이루어졌다. 이날 저녁에 정산(定山)과 청양(靑陽)의 민병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들어왔으며,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였다. 김복한은 ‘존화복수(尊華復讎)’라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로 하여금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와 독자를 빼고 매호에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하게 하였다. 이에 김복한·홍건(洪楗)·안병찬(安炳瓚)과 함께 창의소에서 대책을 수립하였다. 송병직 등은 소모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정제기 등은 대흥의 임존산성을 수리하여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배반하여 김복한 등 총 23명과 함께 구금되었다. 홍주부는 서울에서 내려 온 친위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7일 신우균의 취조를 받고 홍주부에 수감되었으며, 12월 30일 결박당한 채 서울로 끌려가던 중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서 돌아와 홍주감옥에 재구금되었다. 1896년 1월 17일 김복한 등과 함께 서울로 재압송되어 구속되었다. 징역 3년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풀려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유동희(柳東熙)·이봉학 등과 함께 상경하여 이를 무효화할 것을 상주하였다. 1908년 홍주의병 동지였던 이세영(李世永)이 청양 적곡면에 세운 성명학교(誠明學校)의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13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공교회(孔敎會) 등에 활동하였다. 1920년 조재학(曺在學)·전훈(田壎) 등과 조선고사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또한 같은 해 5월 홍성에서 전양진·백관수·유준근(柳濬根) 등과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하고 의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인도공의소서(人道公議所序)」에서 ‘인도(人道)’란 ‘하늘의 떳떳함에 따라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를 하는 것’이요, ‘공의(公議)’란 ‘하늘의 대공(大公)을 본받아 말과 의론을 발양하여 인도를 붙잡는 것’이라고 하면서 ‘무편당’, ‘무내외(無內外)’, ‘중정(中正)’, ‘평화’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도공의소의 목적은 윤리를 밝혀 세계를 새롭게 함에 두었으나 창립 후의 활동은 미미하였다. 1927년 5월 김복한의 문인인 김은동(金殷東)·전용욱(田溶彧) 등에 의해 설립된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유교부식회는 유교를 진흥시켜 ‘대공(大公)’의 세계를 건설함에 목적을 두고 공주, 태안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기관지 『인도(人道)』를 간행하고 수시로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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