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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龜

相龜

1859. 3. 16 ~ 1927.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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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相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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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公州)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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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민종식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59년 3월 16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우성면(牛城面) 보흥리(寶興里)에서 태어났다. 1906년 민종식(閔宗植)의병부대에 동참하여 종사와 좌익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봉기하였다. 호서지역은 1895년 의병이 처음 봉기할 때부터 충북 제천(堤川)·단양(丹陽)·충주(忠州) 일대와 충남 홍주(洪州, 현 홍성군)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한 곳이었고, 특히 홍주는 김복한(金福漢)·안병찬(安炳璨) 등이 홍주의진을 일으켰던 곳이다. 민종식은 충남 정산군(定山郡) 천장리(天庄里, 현 청양군)에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여 살고 있다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906년 초부터 처남인 이용규(李容珪)를 비롯하여 이세영(李世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후 민종식 의병부대에는 1895년 말 홍주의진에서 활동하던 이설(李偰)·박창로(朴昌魯)·안병찬·채광묵(蔡光黙)·이봉학(李鳳學) 등과 이세영이 참여하였다. 1906년 3월 15일 민종식 등이 충남 예산(禮山)의 광수(光水, 현 청양군 광시)장터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먼저 홍주성 점거를 시도하였으나, 홍주군수 이교석(李敎奭)이 협조하지 않고 성문을 닫아 다시 광수로 돌아왔다. 그리고 홍주성 대신 공주부 관아를 공략하기로 하고 선발대를 공주로 보냈다. 그러나 이미 서울에서 보낸 군대가 청양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로 진격하지 못하고 홍주군 화성면 합천(合川, 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3월 17일 새벽 공주부 관군과 일본 헌병대의 습격으로 안병찬·박창로 등 26명이 붙잡혔다. 그러자 민종식과 함께 전북 전주(全州)로 이동하여 이용규(李容珪)·이봉학 등과 재기를 도모하였다. 1906년 5월 11일 민종식·이용규 등과 함께 400여 명의 의병을 다시 규합해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문석환(文奭煥)과 함께 종사(從事)로 임명되었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곧바로 서천(舒川)을 거쳐 남포(藍浦)로 이동하면서, 의병을 초모하고 총포와 화약·탄환 등의 무기를 획득하며 세력을 키웠다. 또한 의병에 협력하지 않은 서천군수 이종석(李種錫)과 남포군수 서상희(徐相喜) 등을 가두었고, 종종 마주치는 일본군을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5월 19일에는 홍주로 진격해 격전 끝에 홍주성을 함락시키고, 성 안에 있는 주민들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의병부대의 편제를 정비하여 다가올 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민종식이 의병 대장, 채광묵·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가 참모장, 이세영·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가 중군장으로 선임되었고, 이때 좌익장(左翼將)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일본 군경의 반격을 예상하고 군사를 6대로 나누어 홍주성의 4대문과 요해지를 수비하도록 하였고, 각 지역에 전령을 보내 의병을 불러 모으며 군수품 등을 수합하였다. 5월 20일 공주·수원·서울 등의 지역에서 홍주로 파견된 일제 군경이 홍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관민과 하나가 된 의병과 함께 수일에 걸쳐 성을 수성하며 위세를 떨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직접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군대를 추가로 급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결과 일본군 보병 2개 중대와 더불어 경성 헌병대대 대위 이하 26명과 홍주 일대에 있던 대한제국 진위대(鎭衛隊) 등이 홍주로 내려와 합세하여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의병부대는 이러한 일제 군경의 총공세에 대비하여 편제를 개편하고, 성첩을 수축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5월 29일에는 홍주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곽한일(郭漢一)과 남규진(南奎振)이 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홍주의진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 일본 군경과 진위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의병부대는 병력을 동문 쪽으로 집결시켜 반격하였으나, 무기나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게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의병장 민종식은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채광묵·성재평(成載平)·전태진(田泰鎭) 등 약 300명 이상의 의병이 사망하고, 수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80여 명과 함께 일본군에 붙잡혔고, 서울 일본군사령부로 압송되어 가혹한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후 윤석봉(尹錫鳳) 등 70여 명은 풀려났으나, 문석환·남규진·유준근(柳濬根)·이식(李侙)·신현두(申鉉斗)·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과 함께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되어 대마도로 끌려온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임병찬과 교류하면서, 1906년 11월 최익현이 사망할 때까지 보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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