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明相

明相

1865 ~ 1909. 5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明相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북 단양(丹陽)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단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 · 김상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이강년 의병부대
  • · 김상한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충청북도 단양군(丹陽郡) 적성면(赤城面) 하진리(下津里) 출신이다. 1909년 5월 부대원을 조사한 일제 보고서에 45세 가량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1865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의병에 가담하기 전에는 양반 유생으로 ‘충청북도에서 손꼽히는 한학자’라는 불릴 만큼 학문에 정통하였다. 1907년 가을 의병을 일으켜 이강년(李康年) 부대와 연합 장의장(仗義將)으로 참여하였고, 이강년이 체포되어 사망한 이후 이강년 부대의 별진장(別陣將)으로 활동한 김상한의 부대에 가담하여 단양(丹陽)·청풍(淸風)·영춘(永春) 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단양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김규철(金奎喆)·민영팔(閔泳八)·이영승(李榮承)·이치정(李致鼎)·이진하(李晋夏) 등과 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때 경북 영천(榮川)출신 이춘삼(李春三)이 “일본은 한국을 침범하여 멸망시키려 함에 이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을 모두 몰아내고 한국을 다시 독립국으로 만들어 안녕질서를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통해 의병을 일으킨 명분을 내세웠는데, 그와 호응하였다. 이 당시 의병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거세지자 경기·경북·강원·충청도에 선유사를 파견하였고, 그에 따라 충청남북도 선유사(宣諭使)로 파견된 이순하(李舜夏)가 충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순하에게 “의병을 진정하러 온 선유사가 과연 임금의 명령인가? 통감을 비롯한 역적 대신의 명령인가? 꾸짖고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함은 황상의 성의(聖意)와 신민의 충의(忠義)인데 감히 원수 역적의 지휘를 받은 자를 선유사라고 할수 있는가” 라고 격분한 글을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재차 봉기한 이강년이 의병의 연합을 모색하자 이에 호응하여 장의장(仗義將)의 직책을 맡아, 1907년 겨울 이강년과 연락하여 군자금 모금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12월 9일 단양군 근처에서 3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이강년의 부대 60명과 함께 일제 군경과 접전을 벌였다. 이강년 부대가 12월 서울진공작전 합류를 목적으로 경기 가평(加平)으로 북상하여 이동할 때, 그대로 남아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백남규·이해수 등과 연합하여 청풍군 도화동에 주둔하며 단양군 궁곡(宮谷)으로부터 청풍의 일제 군경을 습격하였다. 4월 24일에는 단양분견대(丹陽分遣隊) 나라사키(楢崎) 군조(軍曹)의 일본군경과 1시간 반에 걸쳐 접전을 벌이고 후퇴하였다. 이때 부대와 관한 기록에 의하면, 부대원은 한복에 검은 외투를 배낭과 같이 짊어지고 모자는 이명상 의병장만 쓰고, 서양식 단발총과 22년식 기병총을 사용하고 화승총은 다섯 정 가량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단양·청풍 등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중 7월 이강년이 체포되자 남은 부대원은 김상한을 총대장으로 하여 재편되었다. 이때 김상한 의병부대에서 김상태(金相台)와 함께 소모장(召募將)의 직책을 맡았으며 좌익장(左翼將) 이춘삼, 우익장(右翼將) 원근선(元根善), 도령장(都領將) 김성천(金聖天)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이후 본진을 순흥(順興)에 둔 김상한의 휘하에서 (음)1909년 2월 20일까지 안동(安東)·단양·청풍·문경(聞慶)·영춘(永春) 등 충북과 경북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이 부대에 관한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700여 명의 부대원이 단발총과 화승총총 500정으로 무장하고 화약은 인근 백성들로부터 군수로 징발하고 탄환은 납을 사용해 직접 제조했다고 하였다. 이 기간 중 1909년 1월 19일에 40여 명의 부대원과 영춘군(永春郡) 동면(東面)에서 밀정 조종오(趙鍾五)를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고, 2월 5일 이해수(李海秀)·백낙천(白樂天)과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헌병분견소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붙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 후 25명 남짓의 소규모 부대원을 거느리고 단양·청풍(淸風)·충주군(忠州郡) 동량면(東良面) 덕산리(德山里)·연풍군(延豊郡) 수회면(水回面) 방면에서 활약하던 중 같은 해 5월 경상북도 순흥군 함산곡(咸山谷)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가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