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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稙

晩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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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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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晩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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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洪城)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홍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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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중기의병(민종식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이명으로 이만식(李晩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06년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가, 홍주성 전투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민종식이 1906년 5월 11일 충남 홍산(鴻山) 지치(支峙)에서 처남인 이용규(李容珪)·이봉학(李鳳學) 등과 함께 창의하자,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의병부대는 서천·남포·보령 등지를 거치며 군사를 초모하고 무기를 수합하여 5월 19일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의병부대가 홍주성에 입성하자 홍주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합류한 의병들과 더불어 각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부대에 가세하자, 부대에는 약 1,200명에 달하는 의병이 모이게 되었다. 민종식은 홍주성 입성 당일 의진의 편제를 재정비하였다. 홍주 의병부대의 대장으로 추대된 민종식은 참모장에 김광우(金光佑)·조희수(趙羲洙)·채광묵(蔡光默)을 임명하고, 중군장에는 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을 임명하였으며, 이때 소모관(召募官)에 임명되어 각지에서 의병을 초모하고 홍주성을 수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부대를 재편성한 이후에는 군사를 6대로 나누어 홍주성의 4대문과 각 요충지들을 지키게 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다음 날인 5월 20일, 일제 헌병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홍주 의병부대는 10여 일간 공격해오는 일제 헌병대 등을 번번이 격퇴시키면서, 10여 명의 포로를 붙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여러 날에 걸쳐 공성전을 펼쳤음에도 번번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군대를 증파할 것을 명령하면서 결국 1906년 5월 31일 새벽 충주성을 내어주게 되었다. 이때 도망가지 않고 사망한 채광묵(蔡光黙)·성재평(成載平) 등과 끝까지 남은 의병들을 수습하여 항전을 하던 전태진(田泰鎭)·서기환(徐基煥)·전경호(田慶浩) 등을 포함하여 8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다행히 민종식·이용규 등과 더불어 몸을 피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홍주성 패배 이후에도 동료들과 함께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1906년 10월 이용규·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김운락(金雲洛)·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황영수(黃英秀)·정회규(鄭會圭) 등과 함께 충남 예산을 중심으로 자주 모임을 가지고 거의를 결의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예산읍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한곡(閑谷)에 위치한 이용규의 족형 이남규(李南珪)의 집에 회합하여 같은 해 11월 20일에 예산읍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민종식을 다시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으며, 미리 의병을 모아 예산읍 근처에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 역할을 하던 한곡 근처에 있던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제 헌병대에 발각되어, 11월 17일 새벽, 일제 헌병 10여 명, 순사와 병정 40여 명, 일진회원 수십 명에게 습격을 받아 곽한일·박윤식 등이 붙잡혔고, 집 주인인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李忠求)도 체포되었다. 1906년 11월 20일, 신창군 남상면(南上面)에 있는 성우영(成佑永)의 집에 은거해있던 민종식이 체포되면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에 실패하였다. 1916년 7월에는 이용규·윤병일과 함께 연산(連山,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한양리(漢陽里)에 위치한 이내수(李來修)의 집에서 다시 한 번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에 연산 출신인 조종국(趙鍾國) 등 6~7명의 동지를 모아 본격적으로 거의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군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각자 자기 소유의 토지와 가옥을 팔아 거의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우선 가옥을 전당잡아 몇 백 냥의 돈을 마련하여 각 지로 가서 의병을 초모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듬해인 1917년에 일제의 밀정 역할을 하던 박동신(朴東臣)이 “평생 사업이 의병을 도와 성공하게 하는 것만한 일이 없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그런 사람과 일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며 한탄하며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들에게 연락해왔다. 박동신은 마패(馬牌)와 어보(御寶)를 구한다면 의병을 모으고 항쟁을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전용규(田鎔圭)·손진형(孫晋衡)에게 어보와 마패를 구해오도록 꾀었다. 결국 그들이 어보를 구해 박동신에게 넘겨주자 박동신은 총독부에 가서 어보를 꺼내놓고 일제의 상이나 훈장을 기대하면서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밀고하였다. 일제 헌병과 순사 수십 명은 경향을 드나들며 그와 동료들을 체포하기 위해 각지를 빠짐없이 수색하였다. 그러나 이때 의병을 일으키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이내수·윤병일·조종국·최인휴(崔麟休)·이내준(李來俊) 등과 함께 충남 논산의 여관에서 여비를 준비하고, 각지에서 의병을 모으기 위해 의논하던 중이었다. 이때 박동신이 일제 순사 10여 명을 근처에 잠복시켜 놓고 의연금 2천 원을 모아 왔다고 속이며 그들을 찾아왔을 때 일제 경찰에 붙잡혀 동료들과 함께 강경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었다. 1917년 (음)4월 9일 홍주경찰서에 도착하여 모진 고문 속에서 조사를 받았고, (음)18일 경성총감부로 이송되었다. 이때 이 일에 연루되어 경향에서 잡힌 의병만 100명이 넘었다. 결국 1917년 5월 16일 유형 1년을 받아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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