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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大克

大克

1875. 6. 25 ~ 1909. 5. 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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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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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大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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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靈光)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영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일심계
  • · 호남창의회맹소
  • · 기삼연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기삼연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1875년 6월 25일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마촌면(馬村面, 현 대마면) 남산리(南山里) 함평(咸平) 이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1875년 (음)6월 25일과 (음)6월 7일에 태어났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본명은 순식(淳植)이며 호적명은 명식(明植)이다. 자는 영화(英華)이며, 대극(大克)은 일본을 크게 이기겠다는 의미로 자호(自號)하였기 때문에 흔히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일본 측 자료에는 대국(大局 혹은 大國)으로 잘못 기록된 경우가 많다. 단종(端宗)의 폐위에 실망하여 서울에서 전라도로 은둔한 영파정(潁波亭) 안(岸)의 후손이며, 영광에 입향한 죽음(竹陰) 만영(萬榮)은 그의 10대조로서 1538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서장관(書狀官)·병조좌랑(兵曹佐郎)·사간원(司諫院正言)·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는 전규(甸圭), 조부는 성진(誠鎭), 부친은 윤경(潤慶), 어머니는 전주이씨 정덕(鼎德)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영광에서 대대로 유업(儒業)을 이어왔으며,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넉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용기와 담략이 출중하였으며, 생업보다는 호방한 활동을 즐겨하였다. 1893년 영광 법성포(法聖浦)의 물난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회오리가 영광을 휩쓸 때 수성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영광의 수성군은 김응선(金應善)을 비롯한 유생층과 이교층(吏校層) 등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수성군에 참여한 사실이 다소 과장되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침탈이 갈수록 심해지자 장부가 국가의 위험과 임금이 욕을 당함에도 가만히 있다면 속된 유학자나 다름없다며 여러 우국지사들과 정국의 추이에 대해 의논하였다. 1906년 봄부터 동향의 김용구(金容球)와 함께 영광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일심계(一心契)를 창설하였다. 이후 장성의 기삼연(奇參衍), 창평의 고광순(高光洵) 등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며 고창·장성·나주 등지의 유학자들도 일심계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본 세력을 물리치려면 각자의 근거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형성하기로 약속하며 동분서주하였다. 이들이 1906년 봄에 의병을 일으켰다는 광복 전후의 기록이 없지 않으나 일심계를 창설한 사실을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잘못 서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당시 김용구는 모친상, 자신은 부친상중이어서 의병을 일으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상을 벗은 이들은 1907년 (음)8월 초순 영광읍 동쪽의 마치산(馬峙山)을 근거지 삼아 의병을 불러 모았다. 영광의 일심계원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이들은 9월 19일 영광읍을 공격하여 약간의 무기를 노획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듯하다. 장성의 기삼연은 이들보다 다소 늦은 1907년 10월 초순 장성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고창의 문수사(文殊寺)로 이동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용구는 고광순을 만나 의병의 계책을 논의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떠나면서 의병의 지휘권을 이대극에게 이양하였다. 이미 합의한 기각지세를 형성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에 “적의 세력이 강하고 우리가 약하니 단합하지 않으면 적군을 꺾기 어렵다”고 휘하의 의병들을 설득하여 문수사에 주둔하고 있던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나주의 김준(金準) 역시 의병을 이끌고 문수사로 이동해왔다. 기삼연을 비롯한 전라도의 의병들이 문수사에 주둔하고 있음을 눈치챈 일제 군경은 1907년 10월 21일 밤을 이용하여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이에 의병부대가 크게 놀라고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몰랐다. 하지만 김준 등과 함께 침착하게 대응하여 적을 패퇴시켰다. 문수사전투에서 승리한 기삼연 등은 의병부대를 재편하기 위해 장성 수연산 석수암을 비롯한 옥녀봉(玉女峰), 수각(水閣) 마을 등지에 집결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했다. 당시 기삼연은 맹주로 추대되었고, 통령(統領) 김용구, 선봉장 김준, 중군장 이철형(李哲衡), 후군장 이남규(李南奎) 등이 선임되었으며 자신은 감기(監器)로서 군수물자의 조달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11월 1일 고창읍성의 점령에 참여하여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법성포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2월 이후에도 장성의 우편취급소, 영광읍의 순사대 및 일본인 농장, 영광과 무장의 일진회원과 밀정 등 일제의 침략기구, 일본 이주민, 친일세력의 처단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의병에 비협조적인 부호, 세무 관리나 공전영수원 등도 이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항일투쟁 과정에서 의병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에 1907년 말 담양의 용흥사(龍興寺)에서 주둔할 때 기삼연 의병장과 향후 투쟁방략을 의논하였다. 당시 기삼연 의병장에게,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로써 용감무쌍한 적의 군사를 상대하면서, 더구나 무딘 칼날과 둔한 화승총으로 저놈들의 서릿발과 같은 칼날과 번개와 같은 포를 상대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름지기 군사를 휴식하여 싸우지 말고 먼저 총칼을 만들어서 만전을 기하는 것이 급무”라고 말하였다. 압도적인 무기와 전투역량을 지닌 일제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수한 성능의 무기를 조달하는 것이 급무임을 역설한 것이다. 선봉장 김준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기삼연과 김용구는 성능이 좋은 무기의 조달이 절실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의병활동의 중단에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의병항쟁이 중단되면 일본의 군경은 더욱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호남창의회맹소를 4~5개 부대로 나누어 활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약 100명을 데리고 나주와 함평 경계의 석대산(石臺山)으로 들어가 무기의 제작에 전념하였다.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기습을 당한 기삼연이 1908년 2월 2일 음력 설날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선봉장 김준과 연락하여 의병장 구출작전을 도모하자,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제가 기삼연의 탈출을 우려하여 불법적으로 처단하였다. 기삼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며 통곡하자, 부하들이 이대극을 맹주로 추대하였으나 처음에는 사양하였다. 한 번 사기가 꺾이면 국가에 보답하기 어렵다는 부하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일체동심(一體同心)하기로 맹세하며 부대를 재편하였다. 1908년 (음)3월 19일 선봉장 이백겸(李伯謙), 좌익장 김남수(金南洙), 우익장 김관섭(金寬燮), 포장(砲將) 유자성(庾子成), 후군장 이화삼(李化三), 모사(謀士) 노화삼(魯化三), 참모 봉계칠(奉啓七) 정진옥(鄭珍玉) 주현숙(周賢叔) 주만옥(朱萬玉) 등을 선임하여 부대를 재편한 것이었다. 이들은 의병의 훈련과 정예의 무기의 확보가 선결과제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석대산을 근거지삼아 무기의 제작에 진력하는 한편,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분진한 여러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영광 함평 무장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남의 서부 지역에서 기세를 올렸으며, 소수의 정예 의병으로 유격전을 감행하여 일제 군경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음)9월 고창 석곡(石谷)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민가 30여 호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음)10월 하순에는 선봉장 이백겸이 불갑산에서(영광(白峀)라는 설도 있음) 일제 군경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음)11월 4일 선봉장에 강필주(姜弼周)를 임명했으나, 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의 장자산(莊子山)에서 교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 풍찬노숙하며 일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영광의 장사산(長沙山)에 주둔하며 총포를 수리하는 한편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양성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 무렵 의병부대 내의 불화가 무력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휘하에서 활동하던 정대홍(鄭大洪) 의병부대가 의병을 빙자하여 민폐를 끼치자 그 책임을 물어 그들이 소지한 총기 12정을 회수한 바 있었다. 이를 분하게 여긴 정대홍 등이 1909년 5월 21일 휴식 중인 때를 틈타 포위하여 붙잡혀 피살되었다. 시신은 5월 25일 영광 대마면 육덕동(六德洞) 선영에 안장되었다. 아들 백환(伯煥)은 부친의 사망을 슬퍼하다가 망국직후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해방이후 환국하지 않아 아직까지 직계 가족의 행방을 알 수 없다. 광복 직후 영광의 유림들은 충의를 숭모하여 남강사(南崗祠)에서 의령제(義靈祭)를 지냈으며, 족손 승범(升範)과 정범(正範) 등의 주도로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행장과 전, 실기 등을 편찬하였다. 영광향교의 전교 강대흥(姜大興) 등 40인의 유림들은 1949년 음력 1월 실록을 남겼으며, 같은 해 음력 2월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유병두(柳炳斗) 등 47인의 유림들은 거의실기를 남겼다. 그리하여 1951년 음력 4월 호남순열모의계(湖南殉烈慕義禊)는 포충사 충효당 앞에 「호남순국열사지비(湖南殉國烈士之碑)」를 건립하여 한말의병과 순절자의 충의를 기렸다. 비의 후면에 새겨진 의병장 15인 중 1인으로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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