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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南用

南用

188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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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南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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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任實)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임실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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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이석용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5)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하동면(下東面) 구곡리(九谷里) 출신이다. 1909년 판결문에 따르면 22세로, 1887년생으로 추정된다. 의병 활동에 나서기 전까지는 음식을 판매하여 생업을 이어나갔다. 1909년 이후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서울과 원주(原州)의 군인들의 봉기를 시작으로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언제 처음 의병 활동에 나섰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1909년 3월 12일부터 차석록(車錫祿) 등과 함께 열흘 간 부대의 짐을 운반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1907년 8월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의 종사(從事)를 맡았던 의병장 이석용(李錫庸)은 같은 해 9월 4일 전북 진안(鎭安) 석전리(石田里)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구성한 이래 진안과 장수(長水) 등지에서 일본군과 그 기반 시설들을 공격하여 다수의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석용 의병부대의 물자를 운반하다가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09년 6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옥고를 겪고 난 이후에도 의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잔존 의병으로 추정되는 김필수(金必洙)·박보국(朴甫局)·한일성(韓日成) 등과 함께 1912년 12월 17일 전북 임실군 남면(南面) 야당리(野塘里)에 사는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 강정수(姜正秀)에게 군자금을 징발하는 등 의병 활동을 지속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3년 2월 2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상인죄,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다가 1918년 10월 22일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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