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南珪
南珪1855. 11. 3 ~ 1907. 9. 2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홍주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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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尾洞,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아버지 호직(浩稙)과 어머니 청송 심씨(淸松沈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원팔(元八), 호는 산좌(汕左)·수당(修堂)이다. 이후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대술면(大述面)에서 자랐다. 5살 때 『천자문』을 읽었고 이어 『사략(史略)』·『소학(小學)』 등을 공부하였다.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20세 무렵에 경전, 예서, 역사서, 제자백가서에 모두 통달하여 고문(古文)과 예학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나라의 고사나 학통과 당론에 관한 것은 물론, 씨족의 원류와 사방의 풍토며 관방(關防)의 요새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과 함께 서로 도의(道義)로 연마하고 문장으로 사귀었다. 문하에 출입한 제자들로는 신채호(申采浩)·이장직(李章稙)·강기선(姜驥善)·변영만(卞榮晩) 등이 있다. 187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882년 4월 정시 문과에 합격을 하였다. 1883년 승문원권지 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용되었고, 1885년 10월 승문원 박사가 되었고 이어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886년 2월 성균관 서학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 3월 사간원(司諫院) 정언(定言)이 되었다가 6월 다시 서학 교수가 되었다. 1891년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헌부 장령, 지평, 홍문관 부응교, 응교, 수찬, 교리,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 3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고, 같은 해 6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처 다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894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승정원 우승지에 올랐고, 외직으로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가서 광세(鑛稅)를 감하여 백성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 해 5월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오자 「청절왜소(請絶倭疏)」를 올렸다. 동학군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이어 국가의 재정 낭비, 부세 문제, 일본군사의 도성 난입 문제 등에 관해 진술하였다. “동학농민운동과 청나라 군대의 입성을 핑계로 불법으로 도성에 들어온 일본 군대를 하루속히 의리와 사리로써 설득하고 또 외교 교섭을 펴서 물러가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일본이 만일 이웃나라의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왔다면 우리는 저들에게 청한 적이 없었고 자기 나라의 상민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면 우리가 이미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청원하지 않았는데도 수습해주러 왔다는 것은 허위이며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데도 상민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당시 개화의 격랑 속에서 시종일관 의연히 상소를 통하여 일본을 배척하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황후를 폐한다는 조칙(詔勅)이 발표되자, 다시 「청복왕후위호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討賊復讐疏)」를 올렸다. 고종이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나가서 선비와 백성들을 모두 앞에 불러놓고 애통의 조서(詔書)를 내려 전 국민이 국모의 원수를 갚고 종묘사직의 욕을 씻게 해야 된다고 하였다. 군신 상하가 일치단결하면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또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여 정치나 국방을 맡게 하면 국력이 신장될 것이며 외세에 아부하여 아첨하는 자를 정부에서 몰아내고 기회주의자를 숙청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으면 어떠한 난국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1896년 안동(安東)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안동부 관찰사에 임명되어 고종의 명령을 선포하여 선비와 백성들을 무마하였다. 민가에 머물면서 방(榜)을 붙이어 왕명을 알려주기도 하고, 군읍에 격문을 띄워 왕명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당시 구(舊)법(法)을 일체 회복함으로써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의 음모를 꺾어버린 다음에야 백성들의 뜻이 정해지고 여론이 진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97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2월 민회(民會)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라의 정치에 민중의 뜻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민중의 뜻대로 정부의 정책이 이리 저리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민중의 뜻이 정부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강압에 쏠리어 정부가 우왕좌왕한다면 국체(國體)의 유지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1899년 비서승 궁내부 특진관(秘書丞宮內府特進官) 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었으나 그해에 자핵소(自劾疏)를 올리고 시골로 돌아가 생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를 올렸다. 같은 해 11월 “대대로 우리의 원수인 저 일본이 반드시 우리 강토를 점령하고 우리 신하와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고야 말리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만국이 다 같이 아는 바입니다”라고 하면서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스스로 말하기를 갑신정변의 수치를 당했을 때 죽어야 했는데 죽지 못했고, 갑오변란의 치욕을 당했을 때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못했으며, 을미사변 때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못했다가 지금의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차라리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차마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과 함께 원수들의 종이나 첩이 되어서 같은 조정에서 구차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한편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여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洪州)(현 홍성)에 입성할 때 선봉장에 이름이 올랐으나 끝내 홍주에 입성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일본군을 무찌르는 의병운동에 나서지도 않았고 또 자결의 길을 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고 구차스럽게 생명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홍주의병이 크나큰 피해를 입고 민종식이 의병의 재기를 계획하던 중 찾아오자 예산 고향 집인 평원정(平遠亭)에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등 배후에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민종식의 참모이며 족친인 이용규(李容珪)의 청을 들어서 집을 중심으로 홍주 탈환 작전본부가 형성되어 1906년 10월 5일 거사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같은 해 10월 2일 일제 헌병과 관군 수십 명에 의해 포위되어 붙잡혔다. 이때 아들 충구(忠求)와 이용규·곽한일(郭漢一)·박윤식(朴潤植) 등이 함께 붙잡혔다. 일제는 감옥에 가두고 홍주 의병장 민종식의 거처를 확인하고자 무수히 고문하였다. 자백하지 않고자 하였으나 아들 충구가 고문에 이기지 못해 혀를 깨물자 아들을 구하고자 하여 “민종식이 의리를 쫓아 절개를 세우는 것은 그 이치가 당당하지만, 충구가 형을 받아서 목숨을 끊는 것은 그 명목을 댈 데가 없다”라고 하며 자백하였다. 그때는 이미 민종식이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기 때문에 알려주었던 것이나 일제는 민종식의 거처를 탐문하여 찾아냈다. 1907년 9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의 양위 강요와 군대의 해산 등 통탄스러운 굴직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의 봉기는 더욱 세차게 일어났다. 일제는 공주감옥(公州監獄)에 가두고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는가?”라고 묻자, 하늘을 우러러보고 웃으면서 “백만 의병이 자신의 가슴속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갑오개혁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거치면서, 나라의 록(祿)을 먹는 신하이자 유교지식인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늘 부끄럽게 여겼다. 직접 의병운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이념적 지도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와 친일 분자들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제거하지 않는다면 충청도가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기어코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주감옥에서 석방된 뒤에도 홍주 의병부대와 관련되어 있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끊이지 않자, 1907년 9월 26일 일제는 느닷없이 100여 기(騎)의 군사를 몰고 집에 들이닥쳐서 연행해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라고 소리쳐 꾸짖고 가마를 타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두 아들이 쫓아 나오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나를 따라 죽는다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하며 만류하였으나 아들 충구가 뒤를 쫓았다. 이날 밤 온양(溫陽) 외암(巍岩,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의 평촌(坪村)에 이르러 일제는 통역관을 통해 “공은 평소에 일본을 원수로 대해 왔으니 앞으로 의병장이 되시겠소이다. 만약 머리를 깎고 귀순한다면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뿐이다”라고 하며 단발을 강요하고 일제에 협조하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의거는 참으로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내가 지조를 굽힐 것 같으냐”라고 호령하며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도저히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칼날로 어지러이 몸을 내리쳤다. 이어 칼을 뽑아 아들을 베고자 하자 아들에게 “서울에 가서 일의 결판을 기다려라. 어찌하여 함께 죽임을 당하고자 하느냐”라고 하며 칼을 막아 손으로 잡자 다섯 손가락이 잘려져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도 조금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제의 앞잡이들을 향해 준엄하게 호통을 쳤다. 그 자리에서 아들 충구와 함께 사망하였다. 당시 교노(轎奴)인 김응길(金應吉)이 가마의 막대기를 뽑아 일본군을 때려 죽였으나 그 역시 일본군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종 두 명 중에 죽은 자는 김응길이고, 숨이 끊어지지 않아 당시의 일을 전하였던 사람은 가수복(賈壽福)이었다. 저술로는 『수당집(修堂集)』과 『기삼비사(記三婢事)』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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