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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貫會

貫會

1871. 6. 15 ~ 1910.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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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貫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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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和順)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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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안규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71년 6월 15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동면(東面) 운농리(雲農里)에서 태어났다. 안규홍은 본래 머슴 출신의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으로 전남 보성군(寶城郡)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안규홍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당하게 되자 이에 분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안규홍은 “왜적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원수이며 임진년(壬辰年) 이후부터는 하늘을 같이 하고 살 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를 삼켜 버리고 우리 임금을 욕보이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만들게 되었다. 우리들은 선왕의 신민이요 선조의 자손으로 이 광경을 차마 보고만 있겠느냐. 한 도둑놈만 죽이더라도 실로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하여 그 의지를 밝히는 한편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소작농과 머슴들을 널리 의병으로 모집하였다. 여기에 오주일(吳周一)을 비롯한 해산 군인들이 합류함으로써 안규홍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의병부대 내 각 부서와 직위가 체계화된 1908년 2월 즈음에 안규홍 의병부대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안규홍 의병부대에서 선봉장의 직위를 맡았다. 의병부대에는 그 밖에도 부대장 염재보(廉在輔), 참모장 오주일·나창운(羅昌運), 선봉 임창모(林昌模)·이영삼(李永三)·윤영채(尹榮采), 중군장 김종철(金鍾喆)·이양선(李良先)·안재찬(安載瓚), 선후군장 선규명(宣圭明)·김학천(金鶴千)·오윤칠(吳允七), 포량장(布糧將) 박제현(朴濟鉉), 서기 임정현(任淨鉉) 등의 간부들이 있었으며 200여 명의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동료 의병들과 함께 안규홍의 지휘에 따라 안규홍 의병부대의 주요 전투들, 곧 1908년 2월 보성군 득량면(得粮面) 예당리(禮堂里)에서 일어난 파청대첩(巴靑大捷), 같은 해 8월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귀산리(龜山里)에서 일어난 진산대첩(眞山大捷), 1909년 3월 보성군 복내면(福內面) 복내리(福內里)에서 벌어진 원봉산대첩(圓峰山大捷) 등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파청대첩에서는 일본군 중에서도 정예 부대로 이름났던 미토(水戶)와 히라이(平井)가 이끄는 2개 부대를 상대로 매복 작전을 펼쳐서 적장 미토와 히라이를 비롯한 적군을 궤멸시키고 많은 무기와 문서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1908년 8월 24일 보성군 문덕면 대원사(大院寺) 인근에서 적 부대를 야습하여 적군 50여 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됨에 따라 안규홍 의병부대 또한 더 이상 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다수의 체포 및 투항자가 나옴에 따라 안규홍은 결국 자진 해산을 명하고 각자 고향으로 복귀하게 하였는데, 이후 안규홍을 비롯하여 많은 간부들이 붙잡혔다. 당장의 체포는 면하였으나,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 끝에 1910년 8월 30일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결국 붙잡힌 후 처형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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