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祐植
祐植1891. 7. 22 ~ 1966. 7.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어학회
- · 시대일보
- · 중외일보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1919년 의령군 의령면 만세운동
- · 조선어학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91년 7월 22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의령면(宜寧面) 동동(東洞)에서 아버지 이상두와 어머니 연안 김씨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합천(陜川)이며 호는 남저(南樗)이다. 집안은 의령 뿐만 아니라 함안(咸安)·진양(晋陽)·합천 등 4개 지역의 토지를 소유한 만석지기였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9년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고, 의령 출신 단원인 안희제(安熙濟)·이극로(李克魯)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 조국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유학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인(李仁)과 함께 세이소쿠중학(正則中學)을 다녔으며,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1년동안 다니다가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의령 읍내 장날을 기하여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 귀국하여 부산에서 독립운동가 안희제·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하면서 600주를 투자하여 주주로 참여하였다. 이후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20년 5월 마산(馬山)에 무역 및 위탁 매매업을 취급하는 원동무역주식회사(元東貿易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해 1939년까지 경영하였다. 한편, 동향인 이극로에게 상하이 동제대학과 독일 베를린대학의 학비·생활비·활동비 등으로 총 8,890원을 후원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극로는 학업을 지속하면서 중국과 베를린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이극로가 귀국한 뒤 조선의 각 지방을 시찰할 때에도 경비를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시대일보』를 경영하였고, 1927년 안희제와 함께 재정난으로 휴간 중인 『중외일보』에 출자하여 이를 경영하였다. 1928년 7월에 설립된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에 900주를 투자하여 주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중외일보』 사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경남 합천군(陜川郡) 삼가면(三嘉面)에 집중호우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쌀과 보리를 출연하였고, 1930년 7월에 조직된 전조선수재구제회(全朝鮮水災救濟會)에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소작인의 참상을 참작하여 소작료를 인하해 주는 등 고향에서 선한 부자로 알려졌다. “첫째, 재물을 억지로 불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둘째, 아랫사람이나 불행을 당한 사람은 후한 대접을 하라. 셋째, 나 자신과 가족에겐 엄격하라”는 생활 철학처럼 농민 구휼에 앞장서자, 그 혜택을 입은 농민들이 12곳에나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1929년 10월 이극로가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에 맞서 이극로와 함께 우리말을 영구히 유지하고 보전하는 언어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사전 편찬을 위한 재정 지원을 맡게 되었다. 1935년경 조선어사전편찬회 후원회에 장현식·민영욱·김양수·김도연·서민호·신윤국·임혁규·김종철·이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36년 3월 20일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추진해 온 사전 편찬의 업무를 인계받았다. 이때부터 1942년 9월까지 조선어학회에 사전편찬 자금으로 16,140원과 기관지 『한글』 발행 자금으로 1,050원을 후원하는 등 조선어학회에 가장 많은 후원을 하였다. 또한 이극로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가난한 한국 학자들을 위한 후원기관인 양사원(養士院)의 조직을 추진하자, 1,000석이나 되는 전재산을 내놓겠다는 각서를 써 이인에게 넘겨주는 등 평생 이극로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중지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어사전 편찬 후원과 양사원 지원 활동 등을 이유로 10월 18일 의령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이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던 중 1945년 1월 16일 1심 판결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풀려난 출옥 동지들이 만든 모임인 십일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18일 조선독립운동사를 편찬하기 위한 모임인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31일에는 이극로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좌우정당의 즉시 합작을 바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각 정당의 정객 및 정치단체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인은 “그는 특히 민족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과묵하고 실행력이 있는 사람으로 남에게는 숨어서 학자금을 대주되 자기 자신은 항상 근검절약하며 평생 이름 내놓기를 원치 않았다”라고 회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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