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鳳雨
鳳雨1873. 7. 15 ~ 1921. 9.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민자치회
- · 한민교육회
- · 대한국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0) 1873년 7월 15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서면(西面) 초읍리(草邑里, 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한자가 다른 이봉우(李鳳禹)·(李鳳羽)·(李奉雨)를 사용하였다. 1908년 옌지현(延吉縣) 하마탕(哈蟆塘)으로 이주하였다. 1909년 9월 정재면(鄭載冕)·최공일(崔公一)과 함께 한민자치회(韓民自治會,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 지부를 설치하였다. 1910년 3월에는 김약연(金躍淵)·이동춘(李同春)·구춘선(具春先)·박찬익(朴賛翊)·정재면·윤해(尹海) 등과 함께 한민교육회(韓民敎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한민교육회는 이후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로 개편되었다. 이동휘(李東輝)·김약연·서일(徐一)·이동춘·구춘선·김립(金立)·윤해 등과 함께 간민교육회를 기반으로 간민회를 조직하고 민족교육사업과 식산흥업운동을 벌였다. 한편 1910년 국자가(局子街)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간도지방회(間島地方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9월에는 연길교육연구회(延吉敎育硏究會) 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11년 1월 22일 국자가에서 기독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5월 간민교육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6월에는 “간민교육회에서 모든 한인의 교육을 담당하고 모든 교원도 간민교육회에서 관리한다”라는 고시(告示)를 발표하였다. 또한 학생들에게 “곧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이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반도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주지시켰다. 12월에는 “머지않아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일 것이니 이 기회에 한반도에서 일제를 구축(驅逐)하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912년 3월 박춘동(朴春洞)·박무림(朴茂林)·윤해와 함께 “성교적(聖敎的) 교육과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기독교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옌지현 소영자(小營子)에서 구춘선·이남원(李南元)·황원호(黃元浩)와 함께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을 확대 개편한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1915년 3월 하마탕에서 계봉우(桂鳳雨)·정현설(鄭鉉卨)과 함께 예수교회와 소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논의하였다. 6월에는 하마탕에서 정현설과 함께 기독교소학교를 설립하고 안중근전집(安重根傳集)을 편찬하였다. 1915년 3월 일제가 「21개조 요구안」을 중국에 제출하여 중국과 일본 사이에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만일 중일(中日) 간에 국교가 단절되면 전란이 일어날 것이며, 간도는 전란의 요충지여서 양국 군대가 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령(露嶺)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동지들과 연락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야 한다”라는 뜻을 둥닝현(東寧縣) 삼분구(三岔口)에 있는 이종호(李鍾浩)에게 알렸다. 이종호는 이에 동의하면서 거병계획(擧兵計劃)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1919년 2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김교헌(金敎憲)·김동삼(金東三)·조소앙(趙素昻)·이동녕(李東寧) 등 39인의 일원으로 서명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에서는 일제는 “동양의 적”이며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국민의 본령(本領)은 독립이며 사람은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목숨을 아끼지 말고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수”하자고 하였다. 1919년 2월 20일 옌지현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가 조직되었다. 배형식(裵亨湜)·강구우(姜九禹)·김약연·정재면·유찬희(劉讚熙) 등 14명과 함께 의사부원(議事部員)에 선임되었다. 대한독립기성총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편되었다. 대한국민회에 참가하여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간도독립선언운동(間島獨立宣言運動) 위생부(衛生部) 부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16일 나자구(羅子溝) 대전자(大甸子)와 삼하자(三河子) 전이근(全利根)의 집과 최정국(崔正國)의 집에서 김영학(金永學)·구춘선·장봉택(張鳳澤)·정현상(鄭賢尙) 외 14명과 함께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3월 19일 약 1,000 여 명이 참가한 독립선언축하회가 개최되었다. 3월 17일 간도에서 전개되는 항일운동 상황을 알리기 위해 간도에서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을 가지고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하마탕에서 정현설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8월 대한국민회 참사(參事)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