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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彦

明彦

1882 ~ 1927.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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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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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명천(明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명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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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국민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고면(下古面) 출신이다. 1922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41세로,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만주로 이주한 뒤에는 허룽현(和龍縣) 지신사(智新社) 7도구에 살면서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동명학교(東明學校) 설립에 동조하여 한국인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진력을 다하였으며,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국민회는 1920년 4월경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옌지현(延吉縣) 춘양향(春陽鄉) 합마당(蛤蟆塘)에서 조직된 단체로, 조선독립기성총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유문〉에 의거하여 개편된 단체였다. 간도국민회로도 불리는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여 제1남지방회 경호부 제3대파장(波長)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까지 허룽현 7도구 4개 동에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 1천 2백 여원을 모집하였고, 그 해 9월까지 본 지역 내에서 지회를 설치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대원들과 같이 만주 및 국내에 진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7월경에는 함북 무산군(茂山郡) 풍계면(豊溪面) 명망동에 거주하고 있는 강치근(康致根)·강윤병(康潤柄) 등에게 군자금을 납부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았다. 같은 해 8월경 장두량(張斗良) 등과 함께 함북 부평군(富平郡) 청암면(靑岩面) 직하동(稷下洞)의 방낙선(方洛先)에게 1천 여원을 차출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았으며, 장남섭(張南燮)·장두량 등과 함께 강인백(姜仁伯)·황학천(黃鶴天)·김병철(金炳喆)·석주국(石柱國) 등에게도 군자금 1,000여 원을 제공하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그 후 청진부 장시형(張始亨)으로부터 100여 원, 그 해 9월 4일 함북 경성군(鏡城郡) 용성면(龍城面) 회암동(回岩洞)에서 차용관(車用觀)으로부터 249원의 군자금을 받았다. 만주로 돌아온 후 이민준(李民俊)과 등과 함께 박을팽(朴乙彭)의 집에 모여 일제 밀정 김응학(金應學)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 후 허룽현(和龍縣) 회백사(回白社) 소소동(小蘇洞) 부근의 호랑이굴이라는 골짜기에서 김응학을 처단하였다. 1920년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재만 교민을 규합하고자 대한신민단·대한광복단·대한국민회 등과 연합하여, 산하 조직으로 총판부(總辦府)를 설치하였다. 이때 여기에 가입하여 남북총판부(南部總辦府)의 참사로 활동하였다. 그 후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회령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검거 당시 권총 1정과 탄환 10발을 소지하고 있었다. 1921년 9월 3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강도살인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2년 2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7년 7월 5일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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