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광식
權廣植1886. 9. 17 ~ 1946. 11.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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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6년 9월 17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명지리(明池里)에서 태어났다. 권영채(權寧彩)라는 이명을 사용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 명지리 구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현북면 시위는 면내 기독교인과 유학자, 각 마을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논의되었고, 현북면 내 각 마을이 힘을 합쳐 함께 일으키기로 결의되었다. 거사 일은 읍내 장날인 4월 9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시위를 준비해나갔다. 이때 상광정리(上光丁里)·중광정리(中光丁里)·하광정리(下光丁里)·대치리(大峙里)·말곡리(末谷里)·원일전리(元日田里)·도리(陶里)·명지리 등 각 마을의 구장이 주민을 규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명지리 구장으로서 4월 6일 김재한(金在漢)으로부터 계획을 듣고 명지리 주민들의 만세 시위운동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전날인 8일 주민들을 한 자리에 모아 각 집에서 1명씩은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하였다. 4월 9일 명지리 주민 40여 명과 함께 현북면 하광정리 현북면사무소 앞으로 나갔다. 오후 2시경 면사무소 앞에는 각 마을 구장의 인솔하에 6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친 후 함께 기사문리(基士門里)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였다. 막대기와 괭이 등을 가지고 “순사를 죽이겠다. 주재소를 파괴하겠다”라는 등의 소리를 지르며 주재소로 진입하였다. 이에 강릉수비대의 보병들이 출동하여 경찰과 함께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았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현장에서 9명이 순국하고 14명이 다쳤다. 이후 수비병과 양양경찰서 경찰들이 출동하여 마을을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를 색출하였다. 5월 14일까지 374명이 검거되었고, 탄압을 견디지 못한 200여 명의 시위 참여자가 자수하였다. 이때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과 벌금 30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920년 3월 8일 소요 혐의에 대한 항소 사실만 무죄로 인정받으며 징역 8개월 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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