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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觀稙

觀稙

1883. 7. 10 ~ 197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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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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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公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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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협동학교
  • · 경학사
  • · 신흥강습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1883년 7월 10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사현리(沙峴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치용(穉用), 호는 해설(海齧)이다. 아버지는 연안부사 승위(承緯)이며,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이다. 1895년 감역(監役) 유석기(柳奭基)의 장녀 중권(重權)과 혼인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의 보병과에 입학하여 1903년 9월 20일 졸업하였다. 1905년 4월 18일부터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에서 근무하고 1907년 육군 보병 부위(副尉)로서 진위보병(鎭衛步兵) 제2대대에서 복무하던 중 군대 해산을 당하였다. 1907년 4월 안창호의 발기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정치 체제는 공화 정체(共和政體)로 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활동은 첫째, 교육 구국 운동으로서 전국에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일, 둘째, 계몽 강연, 학회 운동, 셋째, 잡지, 서적의 출판, 넷째, 민족 산업 진흥 운동, 다섯째, 청년 운동, 여섯째,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신민회의 교육 구국 운동 방침에 따라 1907년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하중환(河重煥)·안상덕(安相德)·김기수(金基洙)와 함께 경북 안동(安東)에서 신문명을 가르치는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학교의 명칭을 ‘협동’이라고 한 것은 ‘나라의 지향(志向)은 동국(東國)이며, 면(面)의 지향은 임동(臨東)’이므로 ‘동(東)’을 채택했고, ‘협(協)’은 안동의 동쪽에 위치한 7개 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 것이므로 ‘협동’이라고 하였다. 협동학교에서 교사로서 활동하였는데, 김기수, 안상덕와 함께 신민회에서 파견한 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안동 지방의 유림 개화에 공헌하였다. 1911년 3월 협동학교 1회 졸업생 80명이 배출되었는데, 대다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협동학교는 학생들에게 단발을 강요하였다는 이유로 1910년 7월 최성천(崔聖天) 의병의 습격을 받아 교감 김기수, 안상덕과 서기 이종화가 살해당하였다. 1910년 9월에는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적합한 후보 지역을 물색하기 위하여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 등과 함께 4명이 함께 백지(白紙)장수로 가장하여 간도(間島)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정착지 선정 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해서 1911년 신민회에서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조국 광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하였다. 이동녕·이광(李光)·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군사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경학사를 조직한 본래의 취지에 따라 육영 영농에 필요한 자금의 수합에 힘썼다. 경학사는 민단의 성격을 띤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 단체였다. 망명 민족 운동가들은 국내외 각지에서 청장년을 비롯한 이주를 희망한 한인을 모아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목표를 세웠다. 이와 같이 조직된 경학사는 내무·농무·재무·교무 등 4개 부서를 두었고, 초대 사장에는 이상룡,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임명되었다. 경학사 회원들의 노력으로 이후 삼원포에는 민족운동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신민회 회원 출신의 지도자들과 힘을 합해 이주 한인의 자제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키면서 한인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1912년 가을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장유순의 동생 도순(道淳)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안확(安廓)의 집을 근거지로 군자금 모금을 전개했지만 여의치 않자 도순은 만주로 돌아가기로 하고 국내에 머무르면서 군자금을 구해 1년이나 2년 뒤에 만주로 가기로 하였다. 1913년 이회영이 귀국하자 이회영을 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배재학당(培材學堂)의 학생 동원 책임자로 활동 중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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