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再述
再述1901. 11. 14 ~ 1968. 12.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흥업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대구부 서문시장 및 영일군 청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1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송라면(松羅面) 화진리(華津里)에서 이동화(李東華)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안(淸安)이다. 자는 윤백(允白)이고, 호는 반계(潘溪)이며, 별명은 봉정(奉楨)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부(大邱府) 서문시장과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淸河面) 덕성리(德城里)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만주 흥업단 단원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일찍이 집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17세에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하였다. 계성학교에 다니던 1919년 3월 8일 대구부 서문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태원(李泰元)·안덕환(安德煥)·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등과 함께 3월 22일 청하면 덕성리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울로 올라갔다. 1921년 2월 하순 길림성군정서(吉林省軍政署) 부속 흥업단(興業團) 단원 이만준(李萬俊)의 권유로 흥업단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였으며, 달성(達城) 출신의 박수의(朴守義)를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흥업단은 1919년 3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흥업단의 적십자사 회계서기로 있던 이만준이 1920년 11월 초순경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창규(金昌奎)의 비밀 명령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모금할 목적으로 12월 하순경 국내로 들어왔다. 이만준과 함께 경남 밀양(密陽)·양산(梁山), 경북 대구(大邱)·달성(達城) 등지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단원으로 가입시켰고, 이들의 협조를 받아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1년 4월 하순 서울에서 이만준의 명령을 받고 홍종락(洪鍾洛)과 함께 경북 봉화(奉化)에서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이만준이 박수의에게 맡겨두었던 권총 2정과 실탄 17발을 받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홍종락이 사고로 동행할 수 없게 되어, 김우창(金佑昌)과 함께 가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27일 김우창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봉화로 향하던 중, 이를 알아챈 경상북도 경찰부의 추적을 받고 경북 군위(軍威)에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고 소지하고 있던 권총과 실탄을 모두 압수당하였다. 이로 인해 관련자 28명이 검거되면서 흥업단의 국내 조직 전모가 드러났다. 이 일로 1922년 6월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이른바 강도 상해와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23년 1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만기 출옥으로 풀려났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다시 검거되어 4주간 구속되었다가 국내로 송환되었다. 1927년에는 일본인과 언쟁을 벌여 이른바 사상불응죄(思想不應罪)로 구류 3주일과 30원의 벌금형을 받는 등 저항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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