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규
李利奎1896 ~ 1938. 11.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형평사
- · 조선노동당
- · 북풍회
- · 함남사회운동자동맹
- · 함흥대중운동자동맹
- · 신간회 함흥지회
- · 함흥옹호동맹
- · 태평양노동조합 블라디보스토크지부
- · 함흥노동연맹
- · 조선적색노동조합 함남위원회
- · 철원사회주의자협의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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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8)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파도면(波道面) 송평리(松坪里)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96년생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측 자료에는 1901년 단천군 수하면(水下面)에서 태어났고 1922년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4년 이후 함경남도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2월 홍원청년회(洪原靑年會) 주최로 개최된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여성의 사회적 입지와 그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4년 8월 15~16일 대전(大田)에서 개최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 중앙총본부 임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및 교육부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날인 8월 17일 개최된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 창립총회에서는 노농부(勞農部) 노농소작위원(勞農小作委員)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25일 개최된 북풍회(北風會) 결성에 참여하여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북풍회 집행위원 12인 연명(連名)으로 “조선과 일본의 무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호소”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일본의 사상가들에게 발송하기도 하였다. 1926년 3월 5일 결성된 함남사회운동자동맹(咸南社會運動者同盟)의 간부 채규항(蔡奎恒)·도용호(都容浩)가 같은 해 7월에 검거되면서 활동이 미약해지자, 그해 가을 경부터 다시 동맹을 재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해 9월 10일경 함남 홍원군(洪原郡) 삼호시(三湖市)에서 김석술(金錫述)·박형성(朴炯聖)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노동조합 사무실 등에서 크로포트킨·레닌 등의 저서로 신사상을 학습하다가 삼호주재소(三湖駐在所)에 붙잡혔다. 홍원경찰서(洪原警察署)에서 취조를 받고 9월 26일 함흥검사국(咸興檢事局)으로 송치되었으나, 10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불기소(不起訴)로 풀려났다. 1927년 5월경 함흥대중운동자동맹(咸興大衆運動者同盟)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함남사회운동자동맹과 함흥대중운동자동맹을 중심으로 신간회(新幹會) 함흥지회(咸興支會) 설립을 위한 준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7월 2일 이순기(李舜基)·이수을(李秀乙)·홍기진(洪基鎭)·김영숙(金英淑) 등과 함께 함흥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함흥지회 설립준비위원회을 개최하고, 7월 9일 개최될 설립대회 제출 안건과 제반 준비를 담당하였다. 1928년 1월경 함흥옹호동맹(咸興擁護同盟) 위원으로 있으면서 만주에서 강제로 쫓겨난 동포들을 위해 격문을 배부하며 이틀간 철시(撤市)한 사건으로 인해 함흥경찰서에 강제로 구인되었다가 8일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그 해 2월 2일 다시 함흥경찰서에 소환되는데, 곧바로 기소되어 함흥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929년 8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태평양노동조합(太平洋勞動組合) 제2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1930년 태평양노동조합 블라디보스토크지부 조선부(朝鮮部) 파견원 자격으로 국내로 들어와, 그해 5월 한병류(韓炳硫)와 장회건(張會建)을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였다. 이후 이른바 태평양노동조합의 「10월서신」 및 프로핀테른의 「9월테제」 등에 입각하여 국내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는 활동을 여러 지역을 오가며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1년 1월에는 함흥노동연맹(咸興勞動聯盟)을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개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후 조선적색노동조합(朝鮮赤色勞動組合) 함남위원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음)1월경부터 5월경까지 김순만(金順萬)·김호반(金鎬盤) 등과 함께 서울과 강원 등에서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1년 3월 결성된 이른바 ‘흥남좌익(興南左翼)’, 그해 10월 함흥에서 결성된 ‘흥남자유노동조합’ 등 여러 지역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조직 결성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6월 11일에는 정의식(鄭宜植)·박용준(朴龍俊)·안종호(安宗浩)·임시배(林時培) 등과 함께 철원사회주의자협의회(鐵原社會主義者協議會)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철원군에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철원사회주의자협의회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자, 검거를 피해 러시아로 건너갔다. 이후 러시아 극동의 포시에트구역 스바보드니(일명 자유시)에 거주하면서, 『레닌의 길』 신문사 편집부 지도원으로서 ‘신문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1935년 11월 20일 내무 인민위원부 포시에트구역 지부에 의해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감옥에 투옥되었다. 1936년 8월 1일 소련 내무 인민위원부 산하 특별협의회의 결정으로 카자흐스탄으로 3년의 유형(流刑)에 처해졌다. 이후 카자흐스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크즐오르다 폴토라츠카야가에서 『레닌의 길』 콜호즈원으로 생활하다가 1938년 2월 15일 다시 투옥되었던 듯하다. 같은 해 9~10월경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 내무 인민위원부 산하 3인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최고형인 총살형을 받고, 그 해 11월 19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1961년 1월 9일(1960년 7월 27일이라는 기록도 있음) 투르케스탄 군관구 군사재판소에 의해 복권(復權)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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