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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允平

允平

1889. 5. 5 ~ 198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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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允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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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齊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제주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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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법정사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법정사 항일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9년 5월 5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에서 이성돌(李成乭)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부(古阜)이다. 1918년에 일어난 법정사(法井寺) 항일시위에 참여하였다. 법정사 항일시위의 최고 책임자는 경북 영일(迎日, 현 경북 포항시) 출신으로 1914년부터 제주도에 들어와 법정사에 머물고 있었던 김연일(金連日)이다. 1918년 법정사에는 김연일을 비롯하여 정구용(鄭龜龍)·장임호(張林虎)·김인수(金仁秀)·김용충(金用忠)·김삼만(金三萬)·강민수(姜敏洙) 등 7명의 외지인이 체류하고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주도에 있는 일본인 관리와 거류민들을 몰아내야만 한다고 주장하던 김연일은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와 함께 산천단(山川團)에서 형제의 의를 결성한 뒤 법정사에서 항일 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사를 앞두고 인원 동원을 위해 선도교(仙道敎)와 접촉을 시도해 1918년 8월 방동화가 선도교 지도자인 박주석(朴周錫)을 찾아가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9월 8일 법정사를 찾아온 박주석이 김연일 등과 세부 실행 계획을 계획하였다. 9월 19일에는 법정사에서 행해지는 우란분재(盂蘭盆齋)에 참석한 남녀 교도 30명에게 김연일이 항일 의지를 밝히며, “왜놈이 우리 조선을 병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제 병합 후에도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곧 불무황제(佛務皇帝)가 나타나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들을 제주도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법정사의 항일시위는 10월 4일 밤부터 5일 동안 준비되었다. 먼저 김연일은 법정사 주변의 좌면(左面)과 우면(右面)의 면장과 이장들에게 “이제 각 면 이장은 즉시 마을 장정을 모아 솔군(率軍)하여 10월 7일 오전 4시 하원리(河源里)에 집합하라. 그래서 10월 8일 대거 제주성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을 추방하라. 이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군법에 처한다”라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였다. 10월 5일에는 법정사에서 청장년 33명으로 선동대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대원으로 참여하였다. 김연일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불무황제임을 선포하고 선도교 수령인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우대장, 양남구(梁南久)를 중군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 장임호를 모사(謀師)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박주석과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의논하고, 우선 서귀포와 중문리를 공격한 뒤 제주성내로 나아가서 일본 관리와 일본인을 축출하자는 대원칙을 정하였다. 또한 봉기군이 지나가는 연도의 각 마을 이장으로부터 민적부를 받아 장정을 징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준비된 무기는 화승총 3정과 곤봉 수십 개 정도였다. 10월 7일 새벽 법정사에 집결한 선봉대 32명과 더불어 서귀포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도순리(道順里)·영남리(瀛南里)·서호리(西好里)·호근리(好近里)를 돌며 항쟁 대오를 꾸렸으나, 가담하는 사람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귀포 공격을 중지하고, 중문리(中文里)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중문리로 향하던 봉기군은 강창규의 명령을 받고 강정리(江汀里)와 도순리 사이의 대천(大川) 옆에 세워져 있던 서귀포에서 제주성을 잇는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다. 이후 하원리에 이르자 400여 명으로 불어난 봉기군은 중문리로 향하던 길에서 만난 일본인 고이즈미 키요미(小泉淸身)와 윤식명(尹植明) 목사 일행에게 돌을 던지고 곤봉으로 구타해 부상을 입혔다. 박주석 부대는 서호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김연일은 중문리 경찰관주재소 습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리고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지르고 경찰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 3명을 포박한 뒤 유치장에 갇혀있던 13명을 풀어주었다. 일제 경찰은 급히 목포에 증원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진압에 나서자 봉기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결국 법정사 항일시위로 모두 66명이 구속되었고 그 가운데 31명이 실형을 받았으며, 2명은 재판 받기 전에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이 일로 일본군에게 붙잡혀 1918년 11월 11일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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