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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雲赫

雲赫

1895. 3. 14 ~ 1937.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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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雲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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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경성(鏡城)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경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서울청년회
  • · 전조선청년당대회
  • · 조선청년총동맹
  • · 고려공산동맹
  • · 춘경원당(서울파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독립장(2009)

관련 사건

  • · 함북 연통제 사건
  • · 경성설화사건
  • · 조선공산당
  • · 공산청년회 재건정리위원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9) 1895년 3월 14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오촌면(梧村面) 수성리(壽星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춘추(李春秋)·최광식(崔光植)·김옥산(金玉山) 등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와 함일실업학교(咸一實業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함북도청과 경성군청에서 근무하였다. 1919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臨時聯通制)가 공포되면서 국내 비밀 행정 조직으로 전국을 13도 12부 215군으로 나누어 서울에는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각 도에는 감독부(監督府), 각 부(府)와 군에는 총감부(總監府), 각 면에는 사감부(司監府)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11월 함북 경성 등에서 박원혁(朴元赫)·김인서(金麟瑞) 등 지식인들이 조직한 함북 연통제(聯通制) 사건에 연루되어 나남(羅南)경찰서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7~8개월 동안 일제 경찰의 혹독한 조사를 받고 47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1920년 7월 7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예심이 결정되고 같은 해 8월 4일부터 공판이 진행되어 8월 15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같은 해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 1920년 8월 22일자에는 ‘세인(世人)을 경해(驚駭)케 한 연통제 공판’이란 제목 아래 “온 세상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더욱 당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라고 보도하였다. 풀려난 이후 『동아일보』 경성지국을 운영하고, 잡지 『신건설(新建設)』 주간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20일에는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의 13개도 오르그 가운데 함경북도 오르그에 임명되었다. 1923년 2월 20일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의 비밀조직 고려공산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 등 17명의 중앙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3월에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경성청년회(鏡城靑年會)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함북청년단연합회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자 함북청년단대회를 개최하여, 교육문제, 산업문제, 위생문제, 풍속습관문제, 청년단발전에 관한 것 등을 결의하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 4월 21일 총 223개 단체의 대표와 600~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25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조선청년총동맹은 소작(농민)운동, 노동운동, 사상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등 각 부문운동에서 전위(前衛)를 자임하였다. 또 조선청년총동맹 산하의 각 청년회는 농민강습, 노동교육, 소작조합·노동조합과 결합하면서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4년 8월 14일 함북 경성고등보통학교(鏡城高等普通學校) 강당에서 개최된 학술강연회(學術講演會)에서 “조선민족을 부활시키는 것은 첫 번째로 지식을 발달시키는데 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바다에 떠다니는 기선 하나라도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또 무산자계급들은 아플 경우에도 돈이 없어 약과 음식을 구입하지 못하여 사멸하게 된다. 이런 지식의 결여, 빈부의 현격한 차이는 사회제도의 불비(不備)에 기인하는 것으로 지식의 결여를 보충하고, 빈곤한 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려면 현대 조선사회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른바 ‘경성설화사건(鏡城舌禍事件)’으로 다시 붙잡혀 1924년 12월 1일 청진지방법원(淸津地方法院)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1925년 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1925년 3월 화요파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계획’에 대하여 서울파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과는 별도의 대회를 개최한다고 비판하며, 1925년 4월 6일 전조선노농대회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이때 80여 명의 준비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16일 고려공산동맹 제2차대회에서 김사국·정백(鄭栢)·이영 등 17인과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25년 7월 29~30일 경성 한성강습원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제1회집행위원회 간담회에 이영 등 14인과 참여하였다. 그 해 10월 10일 서울파 사회주의자들의 합법적 사상단체인 전진회(前進會) 창립 때 김사국·이영·이정윤 등 20여 명과 가입하였다. 1926년 3월 김영만(金榮萬)·최창익(崔昌益)과 함께 고려공산동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선임되어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동향, 고려공산동맹의 활동 상황을 보고하고 통일조선공산당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27년 5월 8일 자신이 주도하는 함북 대중운동자동맹에서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사회운동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비약해야 할 전기에 도달했다고 하며 함북대중운동자동맹의 해체를 결의하고, 대중교육자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때 맹두은(孟斗恩)·박노영(朴老英)·남윤구(南潤九)·김창일(金昌一) 등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신간회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안광천(安光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엠엘파(ML파)의 정치노선으로 기울어졌다. 1927년 9월 이영 등 서울파 세력과 조선공산당을 탈당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20~22일 서울파 조선공산당 ‘3차당대회’(일명 春景園黨)가 개최하였을 때 서기로 선출되었고, 중앙집행위원회 선출을 위해 이낙영(李樂永)·이병의(李丙儀)와 함께 3인의 전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서울파의 새로운 도별 대표와 집행위원을 구성할 때, 함북 대표 겸 정치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5월 신의주경찰서의 ‘서울파’ 조선공산당사건 검거를 피하여 고학당(苦學堂) 교장 이준열(李駿烈)과 협의하여 이준열·방한민(方漢旻)·이민용(李敏用) 등을 중심으로 한 ‘서울파’ 조선공산당 ‘후계기관조직’을 구성하고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29년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울상해파’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방법에 관해 협의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재건운동 중앙기관의 위치 문제를 둘러싸고 서울상해파 다수파와 의견 대립이 빚어지자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결성에 불참하였다. 1929년 3월 이기순(李基淳)·김세권(金世權)을 국내에 파견하여 서울의 후계중앙위원회와 협의한 뒤, 독자적으로 조공재조직준비위원회(朝共再建組織準備委員會)를 결성하였다. 1930년 5월 당 재건을 위하여 송도호(宋道浩)·오산세(吳蒜世)를 입국시키고, 그 해 10월 소련에서 비밀리에 귀국하여 조공재건조직준비위를 해소하고 조공재건설정리위원회(朝共再建設整理委員會)로 재편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조규헌(趙奎憲)·강창거(姜昌擧)·송도호(宋道浩) 등 11명과 함께 1930년 12월 5일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붙잡혔다. 이후 검사국에 송치되어 모리우라(森浦) 검사의 조사를 받다가 1931년 1월 24일 기소되었고, 예심에 회부되어 1931년 1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계 판사 와키데츠 하지메(脇鐵一)에게 조사를 받았다. 1년 6개월이 지난 1932년 7월 7일 예심 종결이 결정되고 같은 해 9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징역 6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민족해방협동전선의 임무 및 조선 무산계급운동의 현단계」, 「현하 조선정세와 혁명의 특질에 관한 테제」, 「당재건의 조직적 방침에 관한 테제」를 비롯한 재건운동 테제를 집필하였다. 1934년 5월 잡지 『삼천리』는 함북에서 사회운동을 가장 먼저 유입한 사람으로 들면서, “10년을 넘게 만주, 동경, 조선을 무대로 사회운동에 활약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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