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星泰
星泰1901. 6. 9 ~ 1937. 12.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생활사
- · 민중사
- · 조선지광사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901년 6월 9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 현 제주시 조천읍)에서 아버지 이용구(李龍九)와 어머니 부원규(夫元圭)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로 상경하여 활동 당시 종로 청진동에 거주하였다. 1913년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고, 1917년 서울 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그해 12월 퇴학한 후, 1918년 9월 YMCA청년학관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일대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붙잡혔다. 1920년 10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도항하여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1년 3월 귀국하였다. 잠시 중앙학교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1922년 『신생활(新生活)』지의 기자로서 「생활의 불안」, 「크로포트킨 학설의 연구」 등의 글을 실었다. 같은 해 11월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다른 신생활사 기자들과 함께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923년 3월에는 『동아일보』에 물산장려운동을 반대하는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을 발표하여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8월 정백(鄭栢)·최익환(崔昌益)·주종건(朱鍾建) 등과 함께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사회문제를 연구할 목적으로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하였다. 9월에는 조선노동대회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부터 『조선지광(朝鮮之光)』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4년 9월 중순경 조선공산당 창립을 목적으로 입국한 정재달(鄭在達)·이재복(李載馥) 사건에 연루되어 김재봉(金在鳳)·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붙잡혀 조사를 받고 10월 20일 풀려났다. 1928년 2월 27일 있었던 조선공산당 당대회에서 『조선지광』이 당 기관지로 지정되고 이 때 그 책임자가 되었다. 3월 10일경 서울 청진동의 조선지광사 사무소에서 이경호(李景鎬)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3월 중순경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조직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코민테른에 보내는 보고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가서 양명(梁明)에게 전하고 6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인 6월 19일 『조선지광』 사무실에서 붙잡혔다. 1928년 7월 11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9년 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출감예정일은 1934년 1월 9일이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29년 7월 24일 급성맹장염으로 인해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풀려난 즉시 경성의전(京城醫專)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치료하였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 1931년 2월 재수술을 받았다. 그 후 1937년에는 모스크바에 살면서 외국인노동자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1937년 10월 29일 소련 정부로부터 “일본이 소련에 대항하려는 목적으로 조선혁명활동을 붕괴하고 밀정-폭동 활동 및 테러활동을 하기 위해 조직한 민족주의적 한인단체 한사당·화요회·엠엘당 등에 들어갔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9일 소련최고재판소 군사협의회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92년 7월 6일자 러시아군 총검사국의 결정에 따라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상희⋮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