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誠完
誠完1900. 12. 10 ~ 1992. 9.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혈성단애국부인회
-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운동
-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0년 12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풍흥리(豊興里)에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는 1897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명으로 이성원(李誠元)을 사용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 3월 제11회로 졸업할 예정이었다. 졸업예정자 신분으로 세브란스병원 견습간호원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19년 2월 도쿄(東京)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金瑪利亞)가 귀국하여 학교로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자, 이를 학생들에게 돌리며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어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함남 원산(元山)의 상동교회와 함흥여고를 방문하여 독립선언서와 지령문 등을 배포하여 만세시위를 격화시켰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면소처분으로 풀려났다. 1919년 4월 중순경 오현주(吳玄洲)·이정숙(李貞淑) 등이 정신여학교 동창생을 중심으로 체포,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할 목적으로 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활동하였는데, ‘혈성단’이라는 이름을 제안하였다. 회장에 오현관(吳玄觀), 재무 및 통신원에 장선희(張善禧)를 선출하였다. 이후 회원 확보와 지부 설치를 통하여 회비와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면서 항일단체로 발전해 갔다.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총무 이병철(李秉澈)의 주선으로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로 확대·개편되었다. 이 애국부인회는 기독교회·학교·병원 등을 이용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회원들의 회비와 수공예품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으로 지도부의 활동이 침체해갔다. 이 무렵 만세운동의 여성계 지도자로 수감되었던 김마리아와 황애시덕(黃愛施德)이 출감하여 부진 상태에 빠져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다. 이때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의 출감을 위로·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을 명분으로 이정숙(李貞淑)·장선희·백신영(白信永)·이혜경(李惠卿) 등과 함께 정신여학교 김마리아의 숙소에 참석하였다. 오랜 회의 끝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혹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본부)의 조직과 임원을 개편하였다. 조직은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는 등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전환하였다. 임원은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및 편집원 황애시덕, 적십자 부장 이정숙·윤진수(尹進遂) 등으로 결정하였다. 이때 백신영과 함께 결사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부인회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聯通府)의 역할을 대행하였으며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여 6,000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회원 오현주(吳玄洲)의 배신으로 조직이 탄로나 1919년 11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대구로 끌려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었다. 1920년 6월 정평청년회가 주최한 강연회의 연사로 나와 ‘욕망은 성공의 원동력’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후 원산의 진성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 양성과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박순천(朴順天) 등과 함께 대한여자부인회를 발기하여 애국운동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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