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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昊

秉昊

1887. 11. 18 ~ 1955.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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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秉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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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寶城)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보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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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광복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7년 11월 18일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복내면(福內面) 시천리(詩川里) 에서 아버지 심재(心齋) 이정회(李正會)와 어머니 성주 이씨(星州) (李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성부(性夫), 호는 우재(愚齋), 이명은 이병찬(李秉燦)이다. 부인 윤윤남(尹允南)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상배(喪配) 후 정봉순(鄭奉順)과 재혼하였다. 전남 보성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정시림(鄭時林)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일제 강점을 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스승이 1912년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여 헌병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세상을 떠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품게 되었다. 1912년 보성 겸백면장 박문용(朴文鎔)과 모의하여 거두어둔 세금을 군자금으로 밀송하였다. 1915년 (음)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가 결성될 때 8도 지부 중 전라도지부장으로 임명되어 담당 지역 내에서 전술적 차원의 군자금 모집을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1918년 1월 광복회 경상도지부장 채기중과 만나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하므로, 그 비용 조달을 위해 부호들로부터 돈을 걷기로 하고 중국 본부로부터 온 「경고문」 배부를 부탁받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광주·보성·담양 각지 자산가를 조사한 후 5월에 다시 서울 누하동 김형열(金炯說)의 집에서 채기중과 회합하였다. 채기중과 논의하여 고향의 자산가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하기로 결정하여 실행에 옮겼다. 목포 남교동의 부호 현기남(玄基南)에게 금 6만 원을 기입한 「경고문」을, 보성 득량면의 부호 양신묵(梁信黙) 외 이범래·황봉·박남현·최재학 등 6명의 자산가에게 5천 원 내지 5만 원을 기입한 「경고문」을 전북 이리 등지로 가서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이후 6월 중순 채기중과 함께 보성에 도착해 「경고문」 수신자의 동정을 살폈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군자금 모집에 실패하고 6월 22일 광주로 돌아와 광일여관에 투숙하였다. 광복회 회원 최면식(崔勉植)이 1918년 4월말 중국 창춘(長春)에서 권총 1정과 탄환 22발을 구입해 6월 17일 경 잠입하자 6월 23일 광일여관에서 채기중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그 뒤 3인이 함께 광주를 떠나 목포에 도착해 남일여관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보를 탐지하고 숙소를 급습한 형사와 순사에게 붙잡혀 광복회 위임 문서와 인장, 권총을 압수당하였다. 이 일로 목포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1개월 후 7월 26일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18년 8월 9일 검사의 기소가 있었고, 10월 19일 예심을 마쳐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공갈죄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고향인 보성군 복내면 면장을 지냈다. 그 사이 1945년 12월 재건광복회에서 서무부장을 맡아 보성을 중심으로 전라도지부 회원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3월 단체가 해체되어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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