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석
尹元錫187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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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0)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이인리(里仁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1년 당시 47세인 것으로 보아 1875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강서군 모락장 만세시위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였다.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院場里)와 강서군(江西郡) 반석면(斑石面) 상사리(上四里) 사이에는 5일장인 모락장이 있었다. 그리고 두곳에는 모두 장로교파 교회가 있었다. 원장리와 모락장 중간쯤에 위치한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1919년 3월 1일 평양(平壤)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몇 장의 독립선언서를 얻어 돌아왔다. 곧이어 조진탁은 반석교회와 원장교회, 부근에 있는 금제면 산수리(山水里) 교회와 연합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모락장교회에서도 목사 송현근(宋賢根)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헌병보조원에 발각되어 10여 명이 붙잡혔다. 송현근은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3월 4일 오전 10시 원장리에 있는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독립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 때 모락장 시위가 사전에 발각된 사실을 안 시위 군중들은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한다며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대가 있는 상사리로 향하였다. 8,000여 명을 넘는 시위군중이 모락장의 입구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제 헌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격분한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고 맨주먹으로 저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탄약이 떨어져 도망가던 헌병 주재소장 사토오 미고로(佐藤實五郞)와 헌병 보조원 3명을 잡아 처단하였다. 그리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모두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제 헌병대는 즉시 현장에 출동하여 400여 명을 붙잡았다. 3월 4일 모락장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9명이었고 부상자는 40여 명을 넘어섰다. 모락장 시위는 수원 제암리(堤岩里) 투쟁과 함께 1919년 만세운동의 대표적인 유혈 참극의 하나였다. 이날 붙잡힌 시위 군중 대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주동자로 지목된 49명은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3월 4일의 검거 선풍을 피하여 증산군(甑山郡) 구 읍내에 숨어 있었다. 모락장 시위에서 일제 헌병을 처단한 죄로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21년 10월 24일에 붙잡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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