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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載誠

載誠

1887. 12. 27 ~ 1925.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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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載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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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槐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괴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신사상연구회
  • · 화요회
  • · 꼬르뷰로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괴산군 괴사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7년 12월 27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괴산면(槐山面) 서부리(西部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홍명희(洪命熹)가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고자 상경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3월 15일 고향 괴산에 돌아와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자, 취지에 찬동하여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 전날인 3월 18일 괴산면 동부리(東部里) 홍명희의 집에서 홍명희가 작성한 선언서를 받아 자택으로 돌아와 홍용식(洪用植)과 함께 개인 소유 등사판으로 300장을 인쇄하여 거사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수천 명의 시위대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4월 17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국내로 돌아와 1923년 7월 7일에는 홍명희와 함께 사상연구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공산당 조직 꼬르뷰로 국내부(조선공산당 중앙총국) 조직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11월 신사상연구회가 화요회(火曜會)로 개편된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1924년 12월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상경한 후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재종손인 청풍군 이해승(李海昇)에게 의탁하여 살았다. 1925년 2월 6일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화요회장(火曜會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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