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仁植
仁植1901. 10. 12 ~ 1963. 3.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3.1운동 및 독립자금 모금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901년 10월 12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臨陂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고, 호는 춘고(春皐)다. 부친은 이태하(李泰河) 약 30만원의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으로, 경성부 재동(齊洞) 38번지 김종원(金鍾元)의 방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이병관(李炳寬), 후에 소설가가 된 동향(同鄕)의 채만식(蔡萬植)·강성진(姜成鎭)·김갑수(金甲洙)·휘문고등보통학교의 김성록(金成錄)·조남승(趙南勝)과 3 ~ 4명의 성명을 알 수 없는 학생과 동숙하고 있었다. 2월 25, 26일경 독립운동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3월 1일 오후 1시 반경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국동을 지날 때 보성전문학교의 최동명(崔東明)에게서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단 하숙으로 돌아갔다가 탑골공원으로 향하던 중 인사동에서 장채극(張彩極)을 만났다. 장채극에게서 『조선독립신문』 9장과 독립선언서를 받아 인사동의 미곡상 4곳에 배포하였다. 군중에게 선언서 등을 배부하고 탑골공원으로 가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 군중은 박수를 치고 또 만세를 부르면서 공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군중과 함께 시위대에 가담하여 종로로 나와서 남대문 근처까지 가면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3월 5일 오전 남대문역에서 학생단 만세시위가 있었을 때 국장 때문에 고향에서 와 있던 친척을 전송하기 위하여 오전 8시 40분에 남대문역에 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단 만세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중 속에서 붉은 천을 살포하자, 붉은 천 하나를 주어 만세를 불렀다. 군중이 남대문 쪽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진행하자, 시위대의 일원으로 남대문 근처에까지 갔다. 경찰관이 나타나 군중을 제지하자, 경찰의 진압을 피하여 행진해 나아가는 군중과 함께 북미창정(北米倉町) 입구 근처까지 갔다. 시위대가 해산할 때 집으로 돌아왔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독립자금 모집의 비밀 사명을 띠고 활동하다 붙잡혀 처벌을 받게 된 이원형(李源亨)을 알게 되었다. 출옥 후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고 곧 옥구로 내려가 전답과 가옥 등 재산 중 일부를 팔거나 저당잡혀 마련한 9,000 원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이원형을 만났다. 이원형은 신의주로 가서 올림픽 마크가 있는 엿장수를 찾으라고 했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친척 한 사람을 대동하고 서울에서 개성까지는 기차를 타고, 개성에서는 걸어서 신의주로 갔다. 1920년 8월 신의주에 도착하여 3일 만에 해당 엿장수를 만나 그의 안내를 받아 만주 봉황성으로 가서 임시정부 요인에게 8,000 원의 독립자금을 냈다. 임시정부 요인은 1,000 원짜리 건국공채(建國公債)를 무기명으로 5매, 기명으로 3매를 주었다. 무기명 공채 5매는 자신의 허리띠를 갈라 감추고, 기명 공채 3매는 친척의 가죽신 밑창 안에 넣고 귀국하다가 경찰의 단속이 심해 가죽신 안에 든 것은 신과 함께 버리고 자신이 지닌 것만 가지고 돌아와 집 뒤 조부 산소 옆에 파묻어 숨겼다. 그후 일본·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여러 사립학교를 세웠다. 광복 후 1953년 임피중학교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을 했다. 한때 1만 석에 달하던 재산을 독립운동과 국내외 육영 사업에 집 한 칸 남김없이 다 쏟아 넣고 학교에서 제공한 초가집 사택에서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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