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陽燮
陽燮1894. 2. 8 ~ 1925. 5.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
- · 양성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94년 2월 8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竹栢里)에서 태어났다. 한학이나 신식 학교 교육 기회를 갖지 못했고, 언문 즉 한글을 깨쳤을 정도였다. 1919년 4월 1~2일에 걸쳐 안성군 원곡면(元谷面)·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만세운동에 홍근배(洪根培)·이원섭(李元燮)의 집 용인이었던 윤(尹)모와 서병돈(徐炳敦)·정호근(鄭鎬根)과 함께 죽백리 시위 주도자로서 참여하였다. 원곡면에서는 각 동리별로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이루어지다가 3월 28일부터 계속하여 원곡 면사무소 앞에서 마을 주민들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 4월 1일 밤 8시경 외가천리 원곡 면사무소 앞에 수백 명의 주민들이 짚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모였다. 원곡 면민들은 남길우 원곡면장을 끌어내어 앞장을 세우고 일제 순사주재소와 우편소 등 일제 관공서와 일인들이 있는 양성으로 출발하였다. 원곡에는 면사무소만 있었고, 이전의 군소재지였던 양성에 일본인 순사주재소·우편소 ·면사무소·일본인 상점, 그리고 고리대금업자 등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 내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계획한 것이었다. 이날 죽백리 이양섭 등 주도자들은 동리 사람들을 모아 약 3km 떨어진 원곡면 소재지 시위에 참여시켰다. 양성면 소재지(동항리)는 원곡면과는 성은고개(현 만세고개)를 사이에 두고 약 8km 떨어진 곳이었다. 원곡면 시위대가 양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칠곡리를 지날 때 합류한 사람도 적지 않아 1,000 명으로 불어났다. 1,000 명의 시위대가 원곡·양성의 경계에 있는 성은고개에 이르러 고개 위에서 잠시 쉬면서 주도자들의 연설을 들으며 전의를 고취시켰다. 이 지역 만세시위는 단순히 독립 의사를 표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 내 일본 관공서와 일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어 지역의 해방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가 이 지역 만세시위를 내란으로 보고 전국 3대 시위의 하나로 꼽아 수차에 걸쳐 혹심한 탄압을 통해 주도자를 수색하고 방화 ·고문 ·살해를 자행했던 것도 이 지역의 시위가 일제 통치를 전면 부정하고 통치기관을 정면으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시위대는 “최은식·이희룡 등에게 인솔되어” 양성면 동항리에 진입하였다. 그 시각 양성 면민 수백 명이 밤 9시 반부터 양성주재소에 쇄도하여 독립 만세를 외친 후 9시 50분쯤 막 해산하려던 참이었는데 원곡 방면에서 성은고개를 넘어 1,000명의 시위대가 양성으로 들이닥쳤다. 원곡면과 양성면 두 시위대는 하나가 되었다. 밤 10시경 두 면 시위대 2천 명은 양성주재소로 몰려가 해산을 명하는 순사부장 다카노(高野兵藏)에게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게 한 후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유리창을 깨부수었으며, 주재소에 불을 놓아 주재소와 부속 순사 숙소를 불태우고 서류와 물품 가구 등 전부를 소각하였다. 일제 관공서를 몰아내는 방안의 하나로 주재소를 불태우기 위해 횃불로 주재소 취사장 옆에 쌓여 있는 솔가리에 불을 붙였고, 죽백리 사람 서완득(徐完得)·홍근배(洪根培)·윤(尹)모 등도 불길이 높이 솟도록 힘을 보탰다. 주재소를 전소시킨 시위대는 양성우편소를 향하였다. 우편소에서도 죽백리 시위대들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사무실이 민가 가운데 있어 불을 지를 경우 민가 피해가 우려됨에 따라 우편소 안에서 서류·기물 등을 들고 나와 바깥 공터에서 태웠다. 이때에도 이양섭과 함께 홍근배·윤(尹)모·서완득·최재익 등이 활약하였다. 사기가 오른 만세시위 군중은 계속해서 양성 우편소와 일본인 외리여수(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습격하고, 양성 면사무소의 건물과 기물을 파손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까지 양성면 일대에서 일제 관공서를 방화, 파괴하고 일인들을 몰아내었다. 이때 양성의 일본인들은 부녀자를 버려두고 남자들만 안성으로 도피하였다. 남은 일인들은 우편소장이 산으로 피신시켰다. 이렇게 양성 읍내 시위를 마친 후 성은고개를 넘어 다음날 새벽 4시경에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로 와서 원곡 면사무소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건물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 원곡 면사무소를 방화·소각한 후 죽백리로 돌아와 그 마을에 머물고 있던 토지 조사원 조선인 기수를 구타하고 토지조사 측량기구들을 불태웠다. 양성군과 원곡면 만세시위는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재판에서 일제가 내란 목적을 추궁하면서 황해 수안군 수안면과 평북 의주군 옥상면 시위와 함께 전국의 3대 격렬시위 중 하나로 언급한 시위 운동이었다. 일제는 시위의 중심인 원곡면에 대해 4월 3일, 4월 19일, 6월 1일 3차례에 걸쳐 군경을 특파하여 야간 수색과 민가 방화를 포함하여 포학한 탄압을 자행하였고, 주도자 검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361명이 연행되어 탄압 현장에서 3명, 안성경찰서 고문으로 5명, 서대문 감옥에서 9명, 부상을 입어 사망한 7명 등 모두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붙잡혀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죄·소요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그러나 경성형무소에서 7년째 복역하던 중, 형무소 내에서 만세운동을 몰래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