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舜基
舜基1897. 9. 26 ~ 1959. 12.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9월 26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 두 지역의 주민들은 1919년 4월 1일 연합하여 매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면에서 먼저 시작된 만세시위는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이 주도하였다. 4월 1일 오후 만세시위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받고, 이한영(李漢榮)·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 주민들과 함께 곧바로 동의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날 저녁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이유석·홍창섭 등의 주도자들이 양성면으로 가서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적극 호응하며 시위대의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으로 이동하였다. 양성면이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성은고개에 도착하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휴식을 취할 겸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은 양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주민들을 격동시키는 연설을 하였다. 이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하여 나라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굳게 다잡고,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다시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한편, 양성면에서는 밤 9시 경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끝나갈 무렵 원곡면에서 행진해 온 시위대가 합류하였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약 2,000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고무되었다.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주재소로 행진하여 최은식·이병렬(李炳烈)·이한영(李漢榮)·한응교(韓應敎) 등과 함께 돌을 던지며 주재소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공세에 놀란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양성우편소와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도자토 도요테(外里與手)의 상점 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그러자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원곡·양성 지역으로 파견하였고,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붙잡혔고,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내란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만세운동은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며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라고 판결하였고,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방화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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