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秀哲
秀哲1899. 1. 14 ~ 1933. 7.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결사단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창녕군 영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9년 1월 14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도로 활동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은 이수철(李守哲)이다. 1919년 3월 13일 구중회(具中會)·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남경명(南景明) 등과 함께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고, 영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영산면의 만세운동은 구중회·장진수·김추은·남경명 등 지역의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3월 12일 구중회의 자택에 모여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다음날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야간에 목판으로 많은 태극기와 요약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도 제작하였다. 또한 이들은 비밀리에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보다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같은 천도교인인 구중회 등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그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구남회(具南會)·구판진(具判珍)과 더불어 동참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경 만세시위에 앞서 동지들과 함께 남산(南山)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이며, 만약 후퇴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단원에게 생명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결사단원맹세서(決死團員盟誓書)」를 만들어 모두 서명하였다. 오후 2시경 영산면 읍내로 내려와 미리 제작한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결사단 동지들과 함께 징과 큰 북을 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서 ‘전진가’ 등을 부르며 100여 명과 함께 영산면 읍내 곳곳을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창녕경찰서에서 파견된 경관들에게 주도자 가운데 구중회 등이 체포되었다. 그러자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긴급히 모여 연행된 이들의 석방을 위해 창녕경찰서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저녁 8시경 다시 남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공감한 약 300~400여 명의 주민들을 지휘하여 창녕면(昌寧面) 읍내를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계성교(桂城橋) 근처에 도착했을 때, 창녕경찰서에서 급파된 일제 경찰들이 행진을 막아서며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일제 경찰들과 충돌하였고, 몇 명의 다른 동지들은 창녕경찰서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결국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일부가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