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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水蘭

水蘭

1862. 6. 1 ~ 1926.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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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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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淸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청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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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청주군 미원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62년 6월 1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쌍이리(雙耳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미원면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미원면과 이웃한 강내면(江內面, 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에서 3월 23일부터 전개된 만세운동 소식과 충남 연기군(燕岐郡) 조치원(鳥致院, 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의 김재형(金在衡)이 김재석(金在石)을 통해 미원면에 배포한 독립선언서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신경구(申敬求)·이용실(李容實) 등과 미원면에서 미원장터의 장날인 3월 30일에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3월 30~31일 연이어 일어난 미원장터 만세시위는 주도자가 다르지만, 청주군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3월 30일 오전 미원장터 인근에 위치한 김태복(金泰復)의 집에서 신경구·이용실과 만나 최종적으로 만세시위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오후 2시경 장터로 이동하였다. 장터 사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참여할 것을 호소하자 이에 공감한 100여 명이 동참하였다. 이어서 신경구·이용실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해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자 미원헌병주재소 헌병 군조 우에다 리노스케(植田利之助) 등 헌병 8명이 출동해 시위대를 향해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시위대를 지휘해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강력하게 저항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만세시위의 즉각적인 해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를 주도하는 신경구 등을 헌병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용실과 함께 일제 헌병의 강제 연행에 분노한 1,5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 앞으로 이동해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시위대의 선두에서 솔선하여 주재소로 쳐들어가, 옷을 풀어헤치고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외치며 가지고 있던 담뱃대로 주재소장을 때렸다. 성규원(成奎垣)은 일제 헌병들에게 “어째서 시위 군중을 살상하는가”라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윤인보(尹仁甫)는 맨손으로 일제 헌병의 대검을 빼앗아 대항하였다. 그럼에도 주재소장은 석방 요구에 불응하고,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다시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더욱 분노한 이용실이 “주재소를 파괴하라”, “주재소장을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돌을 던지자, 시위대와 더불어 일제히 돌을 던지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주재소의 유리창과 장지문 등이 파손되었고, 정문 기둥과 담장이 붕괴되는 등 각종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시위대의 공격이 거세지자 일제 헌병은 증원 병력을 기다렸다. 그리고 청주에서 보병 7명과 헌병 6명이 도착하자 일제 군경은 주목하던 주도자 등 20여 명을 체포하고 시위대를 강압적으로 탄압해 해산시켰다. 이때 이용실 등 함께 붙잡힌 10여 명과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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