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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鳳壽

鳳壽

1878. 6. 12 ~ 1919.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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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鳳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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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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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의성군 안평면
  • · 봉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8년 6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대사동(大司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7~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19일 봉양면(鳳陽面) 도리원(桃李院)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총상을 입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안평면에서의 만세시위는 평양(平壤)·대구(大邱) 등의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귀향해 소식을 전한 김원휘(金原煇)·박상동(朴尙東) 등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원휘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가다가 만세운동 상황을 파악하고, 즉시 귀향해 기독교계 인사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였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다니던 박상동도 집으로 돌아와 쌍계동(雙溪洞) 장로교회 목사인 부친 박영화(朴永和) 등에게 대구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달하였다. 이후 만세운동 계획은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3월 15일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의 영수(領袖) 이종출(李鍾出)과 김옥돈(金玉頓)·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은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옥돈·이북술이 “다른 지역에서 이미 만세시위를 하고 있으니 우리들도 실행하자”고 제의하였고, 이종출·이양준이 적극 찬성하면서 안평면에서의 만세운동이 결의되었다. 이후 이만준(李萬俊)·배세태(裵世泰)·이맹준(李孟俊)·이수원(李守元)·정갑이(鄭甲伊)·이흔이(李欣伊) 등이 동지로 결합하였고, 3월 15일 저녁부터 안평면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오후 7시경 50~6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모아서 대사동의 뒷산으로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안평면과 인근 봉양면에서는 19일까지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3월 17일 이북술로부터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고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8시경 이북술·김옥돈 등의 지휘에 따라 이양준·권사연(權士淵)·이종출 등 15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창길동(倉吉洞)과 화령동(花寧洞) 일대를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8일 밤에도 이양준·김유식(金有式)·김도식(金道式)·이만준·이북술 등의 지휘에 따라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마을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거행하고 해산하였다. 3월 19일에는 이북술·김옥돈 등의 지휘에 따라 4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에 모여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안평주재소로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대 일부가 해산하였지만, 남아있는 1,200여 명과 더불어 장날이었던 봉양면의 도리원장터로 행진하였다. 도리원으로 이동하면서 지속적으로 인근 주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이양준 등의 지휘에 따라 봉양면 주민들까지 참여한 시위대와 함께 도리원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는 등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의성경찰서는 비안주재소에 파견되었던 일제 군경을 도리경찰관주재소로 급파하였다. 도리원장터에 도착한 일본 군경은 무력으로 평화로운 만세시위를 제지하며 시위대의 즉시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에 분노한 이양준과 김도식이 주재소 공격을 제안하였고, 오후 1시 30분경 김유식·김일석(金日錫)·김지명(金止命)·권사연 등과 함께 시위대를 선두에서 이끌며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김도식·김유식·김일석·김지명·권사연 등과 함께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 평화로운 만세시위에 대한 무력 탄압에 대해 항의하였지만, 일제 경찰의 위압적인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이에 더욱 분노하여 김도식·김유식·김일석·김지면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몽둥이와 투석으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며 격렬하게 만세세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결국 선두에 있던 권해운(權海雲)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김도식·이양준 등과 함께 총상을 입고 일제 경찰에 붙잡혀 의성경찰서로 끌려갔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6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부상을 입은 상태로 옥고를 겪다가, 총상이 악화되었고, 같은 해 9월 19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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