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奉石
奉石1883. 6. 4 ~ 1953. 12.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83년 6월 4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서 태어났다. 강화 읍내에서 잡화상을 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강화면 읍내 장터에서 10,0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는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의 유봉진(劉鳳鎭), 선두리(船頭里)의 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 등 기독교 감리교계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에 적극 공감하며 강화도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11일 유봉진 등은 황유부의 집에서 거사일을 읍내 장터의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문과 「강화 인민에게」·『국민회보』 등의 인쇄물, 주민들과 함께 부를 「독립가」 등을 만드는 등 구체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황도문이 전단 제작을 맡았고, 인쇄물의 배포는 염성오가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때 장터 상인들의 연락망을 통해 미리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참가 의사를 밝혔다. 3월 18일 사전 연락을 통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주민들이 강화면의 윗 장터와 아랫 장터로 모였고, 시위대의 규모는 무려 10,000여 명에 달하였다. 오후 2시경 유희철(劉熙哲)·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 등의 결사대원들이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들의 선창에 따라 시위대와 함께 일제히 호응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유봉진 등의 지휘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장터에서 강화향교(江華鄕校)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그러자 강화경찰서의 일제 경찰이 진압을 위해 김덕찬(金德贊)·염이선(廉履善)·유재면(柳在冕)·김순덕(金順德) 등 5명의 조선인 순사보를 출동시켰고, 선두에서 결사대원으로 활동하던 유희철과 조기신 등을 연행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로부터 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압박을 받자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군수 이봉종(李鳳鍾)은 대규모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고양되자 유봉진이 시위대를 향해 경찰서로 가서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자고 제안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대와 함께 유봉진의 지휘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강화경찰서로 이동해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유봉진·이사국(李思國) 등과 함께 약 3시간 동안 경찰서를 향해 “연행한 유희철·조기신 등을 즉각 석방할 것과 시위대를 향해 칼을 뽑아 들고 만세시위 해산을 협박했던 김덕찬 등의 일제 순사들을 인도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를 습격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그리고 체포되었던 인사들이 석방되자, 시위대와 더불어 강화 읍내 곳곳을 행진하며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조사와 색출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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