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輔元
輔元1870 ~ 1949. 12.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양평군 강하면
- · 고읍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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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3)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하면(江下面) 병산리(屛山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50세인 것으로 보아 1870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최대현(崔大鉉)·윤기영(尹璣榮)·신우균(申祐均) 등과 함께 1919년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전개된 강하면·양서면(楊西面)·고읍면(古邑面)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31일부터 양평군의 강하면·양서면·고읍면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최대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평소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에 울분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던 중, 고종의 사망 소식과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게 된 최대현은 향리에서 추도 행사를 개최하여, 그 행사의 자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2월 13일 같은 향리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태황제 폐하 붕어하심에 성은에 보답코자 금곡릉(金谷陵)에서 제사를 드리고자 하니, 여러 주민들은 형편대로 기부금을 내어 모두 애도의 뜻을 표하자”는 내용의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자신의 양자 최광식(崔光植)을 통해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빌려 취지문을 인쇄한 후, 2월 하순 양평군내 11개 면의 면장에게 발송하고, 주민들에게도 알렸다. 최대현으로부터 고종 추도행사와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여 윤기영·신우균 등과 함께 동지로 결합하였다. 이들과 논의를 통해 추도행사 및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3월 31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31일 강하면에서 주민 300여 명이 모이자, 최대현·신우균 등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오후 11시경부터 강하면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4월 1일 강하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을 재규합하여 양서면 면사무소 앞으로 행진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다음날에 여운긍(呂運兢)·여광현(呂光鉉) 등이 주도하여 양서면 면사무소 앞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별도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양평군 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규모가 확대되고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더욱 고무되어 최대현·윤기영·신우균 등과 함께 4월 3일 고읍면에서 대규모의 새로운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 등을 제작하고, 인근 4개 면의 주민들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전파하였다. 4월 3일 고읍면으로 강상면·강하면·양서면·고읍면 등에서 주민 4,0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최대현·윤기영·신우균 등과 함께 주민들의 앞으로 나가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알리고, 준비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4,000여 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일제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분위기가 고무된 주민들 중, 양근(楊根) 읍내로 가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최대현 등과 함께 동의하여 만세시위대를 형성하고, 이들을 지휘하여 양근 읍내를 향해 행진을 시작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작은 언덕까지 행진했을 때,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최대현 등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출판법, 기부금품취체규칙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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