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하
金京河1895. 3. 24 ~ 1997. 4.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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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5년 3월 24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강계면(江界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1911년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중등과정인 영실학교(英實學校)를 졸업하였다. 1918년에는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하고 모교인 영실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강계는 평북에서는 선천(宣川)에 이어 두 번째로 기독교가 일찍이 전파된 곳으로서, 1911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가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계례지병원(桂禮智病院)을 세웠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늦게 전해졌다.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해 듣자, 3월 20일경 동료 교사인 정준(鄭儁), 강계읍 교회 장로이자 명신학교(明新學校)에서 회계를 맡고 있던 한봉민(韓奉珉)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세 사람은 서울에서 기독교와 천도교(天道敎)가 제휴한 것을 따르고자 천도교 강계교구에 의사를 타진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여기에 지역 유지들까지 가세하여 모두 21명이 만세 시위 준비에 동참하였다. 만세 시위를 계획한 21명을 이끄는 주도자로서 3월 24일 영실학교에 모여 거사에서 책임지고 희생할 것을 다짐하는 의미로 서명과 날인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 모두가 주동자라는 의미에서 백지 위에 사발을 엎어 놓고 돌아가면서 서명·날인하였다. 연판장은 서명과 날인에 참여한 명운행(明雲行)이 보관하고 있다가 만세 시위 후에 책임 소재를 추궁받을 때 공개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25일 다시 회의를 열어 거사 일을 4월 8일 오전 11시로 결정하였다. 또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기독교 측에서 준비하고 거사 일까지 기독교와 천도교인은 물론 학생·청년층에게 연락하여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영실학교 학생인 김성길(金成吉)·문태선(文泰善)·강석문(姜錫汶)·김명하(金明河)·김형준(金瀅濬) 등과 함께 동생인 김성하(金成河)의 집에서 2,000매에 달하는 태극기를 제작하여 곳곳에 숨겼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인 송기숙(宋紀叔)이 갖고 있던 것을 입수하여 미국인 선교사 함가륜(咸嘉倫, C. Hoffman)의 서기로 일하던 전도사 김창욱(金昌郁)이 맡아 인쇄하였다. 김창욱은 계례지병원 지하실에 등사판을 설치하고 2,000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어 병원 지하실에 숨겼다. 4월 8일은 강계면 장날이었다. 오전 11시에 남장대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학생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집집이 돌렸다. 이준겸의 집 앞 광장에서는 장봉준(張奉俊)이 들고 있는 대형 태극기 2개를 따라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명운행의 선창으로 소리 높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와 악대를 따라 행진하였다. 영실학교 학생인 탁재석(卓在錫)이 나팔을 불고 김창선(金昌善)이 북을 두들겼다. 장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남문(南門)에서 북문(北門)을 향해 행진하였다. 헌병들은 시위대가 헌병분견소를 지날 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가 북문에 이르자 북문 성루 위에 매복해 있던 수비대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수비대의 발포로 시위 주도자 21명 중 한 사람인 정준이 제일 먼저 쓰러져 죽었다. 천도교인 김병찬(金秉賛)과 상인 손주송(孫周松), 그리고 전도사 인국원(印國元)의 부인으로 임신 8개월의 몸이던 한씨(韓氏)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김용애(金龍愛)·지용애(池龍愛)·이경서(李景瑞) 등은 다쳤고,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찰이 주동 인물을 색출하려 하자 명운행이 사전에 약속한 대로 갖고 있던 연판장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이 항소를 기각하자 상고하였다.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병보석으로 출소한 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1921년부터 금릉신학교(金陵神學校)에서 수학하면서 192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25년 고향으로 돌아와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97년 4월 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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